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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최고기온이 37℃까지 오르던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 이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비 온 뒤끝이라 그럴까, 아니면 ‘더위를 처분한다’는 처서(處暑) 때문일까. 거짓말 같은 계절의 변화가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귀뚜라미 등을 타고 온다’는 예전의 처서에는 여름 장마에 눅눅해진 옷을 말리고, 선비들은 ‘포쇄’라고 책을 말렸다는 <키질하던 어머니는 어디 계실까?>라는 책을 읽으며 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나는 지금 가을을 만나고 있다. 기상학적으로는 일평균 기온이 20℃ 미만으로 내려간 후 다시 올라가지 않는 첫날을 ‘가을’이라 한다지만, 이미 내 마음속엔 책과 함께 가을이 와 있는 것만 같다. ‘오늘의 하버드가 존재하는 것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도서관과 책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처럼, 책을 통해 우리는 많은 정보를 얻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 소중한 지식과 삶의 지혜를 배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독서는 이제 취미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상생활이 되지 않았나 싶다.
하루는 학교에 간 아이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엄마, 엄마, 빨리 도서관에 가서 <감기 걸린 물고기>라는 동화책 좀 빌려다 줘. 알았지?”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한단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도서관이 있다는 게 이렇게 고마운 줄 몰랐다. 다행히 책을 빌려왔는데 그 내용이 궁금해졌다.
배고픈 큰 물고기가 알록달록한 물고기 떼를 잡아먹으려고 ‘빨간 물고기는 감기에 걸렸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이간질한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거짓 소문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저학년용 그림 동화책이다. 우리 아이 숙제가 아니었더라면 놓칠 뻔한 <감기 걸린 물고기>라는 책도 덤으로 읽을 수 있는 시간, 들판의 벼들이 누릇누릇 익어가는 걸 보니 가을도 추석을 데리고 벌써 저만치 와 있나 보다. ‘아무리 가깝게 있어도 내가 팔을 뻗지 않으면 결코 원하는 것을 잡을 수 없다’는 노자의 말처럼, 아무리 바쁘고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내가 먼저 짬짬이 책을 가까이해야겠다. 학창 시절 이후론 도서관과 멀어졌지만 이제는 우리 아이랑 시간 나는 대로 도서관의 단골손님이 되어보고 싶다.
‘이 세상의 온갖 책도 너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책은 남몰래, 너를 너 자신 속으로 돌아가게 한다’고 헤르만 헤세가 말했듯 책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우리 아이의 생각도 창밖의 해바라기 씨앗처럼 곱게 여물지 않을까.
누군가 그랬지. ‘가을은 추도(秋盜)의 계절’이라고. 책 속에 들어 있는 진선미의 온갖 보물과 내가 알고자 하는 벌들의 밀원(蜜源) 같은 지식, 일상을 살아가야 할 생활의 지혜는 물론 평범한 삶의 철학까지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가을 도둑’이 되어 이 가을에 마음껏 훔치라는 독서의 계절. 가을이 그래서 좋은가 보다.
게으른 선비가 책장을 넘기든 원님을 책방에서 추켜올리든 따지지 말고 내 손이 미치는 거리에 책 한 권 두었다가 이 가을의 어느 시간에 한번 읽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며 만족일는지 모르겠다. 옛날에야 책도 귀했고, ‘등화가친’이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하여 시기 따라 독서를 장려한 적도 있었지만 냉난방 시설과 문화시설까지 잘 갖추고 있는 지금은 가까운 도서관 친구 하나쯤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일상생활이 되어버린 지금. ‘먹물 뚝뚝/ 떨어지는 저녁 길에/ 달을 따 안듯/ 한 권의 책을 샀다’는 유안진 시인의 책방처럼, 내 아이 손을 꼭 잡고 가을을 기다리는 내 마음은 이미 책으로 가득 찬 부자가 되어버렸다.
박수진 경기 화성시 경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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