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엔터테인먼트 아트디렉터에서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브랜드 총괄로 자리를 옮긴 민희진 씨│빅히트엔터테인먼트
최근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핫이슈라면 단연코 SM엔터테인먼트의 아트디렉터였던 민희진이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브랜드 총괄(Chief Brand Officer, 이하 CBO)로 자리를 옮긴다는 뉴스였을 것이다. 민희진 CBO는 빅히트 및 관계사 전반에 대한 브랜드를 총괄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빅히트의 포트폴리오 확대와 함께 전반적인 기업 브랜딩을 주도할 뿐 아니라, 빅히트에서 준비 중인 새로운 걸그룹의 론칭을 이끌 계획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더해서 자신의 신규 레이블을 설립하고 신인 발굴 및 음악 제작 영역까지 제작자로서 확장된 역량을 선보일 예정이다. 한마디로 민희진 CBO는 빅히트의 브랜딩뿐 아니라 자신의 콘텐츠를 기획, 제작, 총괄하는 역할까지 도맡는다는 얘기다. 이제까지 이런 인사가 없었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라고 할 만하다.
사실 민희진이 SM엔터테인먼트에서 아트디렉터로 재직하는 동안 담당했던 소녀시대, 샤이니, f(x), 레드벨벳 같은 그룹들은 수치적 성과보다는 K-팝의 질적 향상이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많은 팬들이 그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고, 이것은 그를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넘어 디자인과 브랜딩 영역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여기게 만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SM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에서 그의 역할은 아트디렉터 이상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조직의 구조적 문제이자 조직 운영과 경영 경험이 없는 여성이라는 점이 작용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민희진의 빅히트엔터테인먼트로의 이직과 역할은 시사적이기까지 하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의 정체성 자체가 기존의 K-팝 기획사들과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빅히트 CBO 민희진·YG 새 대표 황보경
빅히트는 중소 기획사로 출발했다. 처음부터 성공적인 회사는 아니었고 재정적 어려움도 겪었으며, 무엇보다 방시혁 대표는 빅히트를 기존과 다른 회사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가 빅히트의 비전을 구상하면서 ‘스타트업’을 비즈니스의 롤 모델로 삼은 것은 업계에선 널리 알려진 얘기다. 2018년에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는 최초로 한국스타트업협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여기서 ‘스타트업’이란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그를 통해 수익사업을 벌이는 기업을 뜻한다. 그걸 위해서는 산업구조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남다른 통찰력,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실행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바꿔 말해 조직 구조부터 문화, 운영에 이르는 모든 면에서 기존의 한국 기업과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얘기다. 방탄소년단(BTS)의 성공 또한 이런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무엇보다 소비자(팬)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모든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빅히트는 기존 3대 기획사라고 불리던 SM, JYP, YG가 지배하던 시대가 마무리되고, 다음 세대의 기획사가 등장하는 징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민희진 CBO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YG엔터테인먼트의 새로운 대표이사 선임 소식도 화제였다. 그동안 각종 비리와 범죄에 연루된 것으로 브랜드 이미지와 소속 가수들의 활동에 악영향을 미친 YG엔터테인먼트는 양민석 대표와 양현석 프로듀서가 일선에서 전격적으로 물러났고, 신임 이사회를 통해 새로운 대표이사로 황보경 대표를 선임했다. 18년간 YG엔터테인먼트에 재직하며 경영지원본부장을 맡았던 황보경 새 대표는 YG엔터테인먼트의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미션을 부여받았다. 이것이 피치 못할 사정이기도 하겠지만, 한편 메이저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책임지는 여성 리더라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징후로도 읽히는 것이다.
▶워너 브러더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CEO)에 임명된 앤 사노프│할리우드 리포터
워너 브러더스 첫 여성 CEO 사노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최근 미국에서도 있었다.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워너 브러더스를 운영한 케빈 쓰지하라 회장이 성매매 혐의로 해고된 후 위기에 빠진 워너 브러더스를 구할 책임자로 BBC 미국지부 사장이던 앤 사노프가 임명된 것이다. 워너 브러더스 역사상 최초의 여성 CEO이자 할리우드 100년 역사 최초의 메이저 미디어 그룹 여성 CEO라는 점에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바야흐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음을 시사하는 사건이다. 특히 넷플릭스와 디즈니의 스트리밍 플랫폼에 맞서 2020년 출시 예정인 워너 미디어의 성공이 새 CEO의 역량에 달렸다는 점에서 이번 인사는 단지 제스처가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
한편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 중 하나인 유니버설 픽처스에서는 프로덕션 개발 수석 부회장에 한국인 여성이 임명되기도 했다. 2009년부터 할리우드의 대형 영화 및 TV 프로그램 제작사 ‘라이언스게이트’에서 프로덕션 총괄로 근무한 최제윤 프로듀서는 <너브(Nerve)>(2018), <엔더스 게임 (Ender’s Game)>(2013), <딥워터 호라이즌(Deepwater Horizon)>(2016) 등을 제작했는데 대중적으로 성공한 문학작품을 영화로 옮기는 데 탁월한 안목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2019년 6월 유니버설픽처스 프로덕션 개발 수석 부회장에 임명된 최제윤 씨는 <엔더스 게임> <딥워터 호라이즌> 등을 제작했다.
이 모든 변화는 단지 몇몇 남성의 실수나 잘못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시대적 변화다. 요컨대 여성들이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주요 의사결정권을 갖게 되는 것은 시스템의 변화다. 이 시스템의 변화는 시장의 변화와 밀접하다. 바뀌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가 왔고 이 시대는 근본적인 변화와 혁신을 요청한다. 이렇게 여성 리더의 비중이 늘어나는 것은 단지 성차별 해소를 위한 방편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해외 시장 및 소비자들의 높아진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정책이다. 해외 기관에서는 재무적 성과뿐 아니라 비재무적 요소까지 함께 고려하기 때문이다. 빅히트의 민희진 CBO, YG엔터테인먼트 황보경 대표의 출현 역시 이런 맥락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한국 엔터테인먼트산업에서 마침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차우진_ 음악평론가. 미디어 환경과 문화 수용자들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청춘의 사운드> <대중음악의 이해> <아이돌: H.O.T.부터 소녀시대까지…> <한국의 인디 레이블> 등의 책을 썼고, 유료 콘텐츠 플랫폼 ‘퍼블리’에서 <음악 산업, 판이 달라진다> 리포트를 발행했다. 현재는 ‘스페이스 오디티’라는 스타트업에서 팬 문화, 콘텐츠, 미디어의 연결 구조를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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