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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8일은 결혼 39주년 기념일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우리 부부는 벌써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는 세월을 함께 살아온 셈이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세월이며, 세월은 지나가는 화살처럼 빠른 것 같다. 요즘 같으면 여성들도 서른 넘어 결혼하는데 24살 젊은 나이에 6남매(4남 2녀) 가정에 시집와서 숱한 어려움과 역경도 있었지만, 늘 따뜻하고 자상하게 대해주고 정의롭게 양심적으로 살아가려는 남편이 있기에 마음만은 푸근한 부자로 살아왔다. 이제 37살 된 딸과 36살 아들이 그 세월을 입증해주고 있지 아니한가.
남편과는 40년 전 직장에 다니면서 사귀게 되었고 1년간의 연애 끝에 부모님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셋째 며느리로 들어왔다. 하지만 집안의 얽히고설킨 사정으로 맏며느리 역할을 하며 각종 가내 일을 처리하면서 살아왔다. 그런 탓에 결혼기념일만 되면 내심 남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기도 했지만 거의 보상 없이 지금껏 살아온 것이다. 첫째 형님은 멀리 서울에 산답시고 집안 대소사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둘째 형님은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당시 대학생이었던 시동생은 셋째인 내 몫이 되어 대학 재학 시절 우리 집에서 다니며 졸업했다. 은근히 부화도 났지만 어쩌랴. 시가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생활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니. 물론 시부모님이 농사를 지어 쌀과 농작물을 보내주시고 시동생 등록금도 마련해주어 그나마 괜찮았다.
다른 여자들은 매년 결혼기념일이나 생일 때 흔히 받는 꽃바구니지만 난 38년 동안 단 한 번도 남편에게 받아보지 못해 아쉽고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그토록 많이 이야기해서 귀가 따가웠는지 처음으로 장미 꽃바구니를 보내 눈물까지 흘리면서 기쁘게 받았다. 올해도 으레 ‘그냥 넘어가겠지’ 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당일 기적처럼 꽃바구니를 결혼 후 처음으로 선물받았을 때 기쁨과 흥분, 설렘은 마치 처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실제 말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결혼기념일이면 여행을 간다느니 고가의 선물을 받았다느니, 하다못해 분위기 좋은 데서 식사라도 하는데 지금껏 나는 그 흔한 장미꽃 한 송이 받아보지 못한 게 얼마나 한이 되는지 남편이 몰라 더욱 화나고 섭섭했다. 어느 해엔 너무 화가 치밀어서 다그쳐 물었더니 남편은 ‘마음은 있는데 표현을 하지 못할 뿐’이라고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게 아닌가. 물론 경상도 남자들이 무뚝뚝하고 애정 표현에 무디고 서툰 건 알지만 그래도 수십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꽃 한 송이 받지 못한 건 너무 심했던 것 같다.
그런 남편이 결혼 39년 만에 마음이 돌변했는지, 뭔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일을 올해 와서야 소원 성취시켜주는 게 아닌가. 남편은 하루 전에 꽃배달 서비스에 주문해서 너무도 예쁘고 탐스러운 꽃바구니를 내게 보낸 것이다. 그동안 해주지 못한 걸 화끈하게 해주고 싶었나 보다고 나름대로 생각했던 것 같다. 꽃바구니를 처음 받았을 때는 그 기쁨에 눈시울이 뜨거울 만큼 감사하고 고마웠다. 꽃바구니에 꽂혀 있는 쪽지에는 ‘바쁘게 살다 보니 자상하게 챙겨주지 못한 점 미안하게 생각하오. 늘 내 곁에서 내조하며 아이들 뒷바라지하고 몸 불편하신 시어머니께도 애썼던 당신과 소중한 날을 맞아 모처럼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소. 앞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이심전심으로 서로 이해하고 열심히 살아가길 바라오. 앞으로는 결혼기념일만은 꼭 당신이 받고 싶어 하는 꽃 챙겨주겠소. 영원한 당신의 남편이’라고 적혀 있었다.
꽃바구니를 받았을 때도 기쁘고 고마웠는데 그 글을 읽고는 결국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에 무딘, 감정이 메마른 이 사람한테도 이런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면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하니 괜스레 미안하기까지 했다. 앞으로도 은근히 결혼기념일을 기대하며 남편과 자식, 시어른들께 더욱 잘해 화목한 가정 이루면서 남은 여생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해보는 뜻깊은 결혼기념일이었다.
박옥희 부산 북구 화명3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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