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의 한 웨딩홀. 경사가 급한 망사르드 지붕, 고딕의 첨탑과 첨두 아치 형상이 버무려졌다. 이런 걸 양식적 백과사전주의라고 불러야 할까?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나 시저 펠리가 디자인한 교보빌딩이 서울을 대변하는 건축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서울에서 제일 높은 빌딩인 롯데월드타워나 63빌딩 역시 마찬가지다. 그 자체로는 대단히 거대하고 눈에 띄고 유명할지 모르겠지만 서울 전체로 볼 때는 점에 불과한 그런 단일 건축물이 서울의 인상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울의 인상을 만드는 건축물은 아파트와 도로 주위에 늘어선 익명의 상가 건물들이다. 파리 같은 아름다운 도시 역시 그것을 대변하는 건물은 에펠탑이나 노트르담 대성당 같은 빛나는 랜드마크가 아니다. 1층에는 카페나 식당, 가게가 있고 그 위로는 살림집이 있는 5, 6층 정도 되는 수많은 주거 건물들. 평범하고 획일화된 그 집들이야말로 파리의 인상을 결정짓는다. 그렇게 통일된 양식 위에 가끔 아주 특별한 건물들이 있기에 그것들 역시 빛을 발한다.
▶어느 지방의 르네상스 호텔
기이한 양식의 파편과 잡종교배
서울은 6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라고 자랑하지만, 그 지역은 종로구와 중구, 동대문구 일부 정도지 서울 전체가 아니다. 사실 그 지역마저 오래된 도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궁궐들, 한옥이 아직 파편적으로 남아 있는 북촌, 서촌 같은 협소한 지역에 불과하다. 서울에서 이른바 ‘고도(古都)’를 느낄 수 있는 곳은 극히 일부다. 서울은 그냥 끊임없이 변화하는 혼란스러운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나는 그런 혼란스러운 이미지 속에서도 서양의 수없이 많은 양식이 절충된 파편들을 볼 때마다 기이함과 동시에 흥미로움을 느낀다. 경복궁이나 한옥, 또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나 롯데월드타워보다 이 기이한 양식의 파편과 잡종 교배야말로 서울을 정의하는 아주 중요한 인상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마치 뷔페식당의 다양한 음식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양식, 중식, 일식, 한식 등 모든 것들로 구색을 갖춘 뷔페식당. 그러나 어느 한 가지도 똑 부러지게 잘한다고 말할 수 없는 뷔페식당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서울의 인상이다.
▶속초에서 발견한 한 미술관의 파사드. 고대 신전 양식의 입구가 압도적이다.
서울의 여러 건축물 중에서도 뷔페식당 스타일과 잡종 교배의 정점에 있는 것이 웨딩홀이다. 한국의 웨딩홀은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자 현상으로, 대단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호화로우면서도 결코 품위가 있다고 할 수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결혼식 문화는 아마도 서울이 포화상태를 넘어설 정도로 인구가 집중된 가운데, 결혼식을 과시의 행사로 여긴 것에서 비롯된 듯하다. 1956년작 고전영화 <시집가는 날>에서 보듯 혼례란 신부의 집에서 치르는 것이었다.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결혼식장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 역시 결혼식이 있을 때에만 교회가 잠시 그 역할을 할 뿐이지 결혼식만을 위한 공간이나 건축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구 1000만 명이 사는 거대 도시 서울에서는 매주 벌어지는 무수한 결혼식을 전담할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거제도 해금강 호텔의 파사드. 벽화 창문의 깨알 같은 고전 양식들
결혼식이라는 기능과 프로그램을 전담할 건축의 디자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은 대단히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진지한 과제이기도 하다. 어느 나라에서도 그런 용도로 만든 건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국의 예식장은 건축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다. 그것의 특징은 먼저 이름에서 나타난다. 예식장이라는 이름 대신 ‘웨딩홀’이라는 이름이 정착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결혼식이 이뤄지는 곳은 이국적이고 판타지적인 것이 되어야 했다. 결혼식은 평생 한 번 치르는 중요한 행사다. 무엇보다 신랑, 신부와 그들의 부모는 결혼식을 통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려는 욕망, 그리고 하객들을 잘 대접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졌고, 결혼식 사업자들은 그런 욕망과 심리를 잘 간파했다.
▶강남의 웨딩홀. 고전 양식의 모티프와돔 지붕이 어우러졌다.
웨딩홀과 모텔의 키치적 욕망
그리하여 웨딩홀의 판타지는 서양 고전 양식과 여러 지역의 낭만적인 요소들을 잡종 교배하는 ‘꿈의 궁전’식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미국의 디즈니랜드를 축소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 양식,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중세 성 양식들이 짬뽕이 되고, 여기에 고딕 성당의 첨두 아치형 입구, 아치형 창문, 이오니아식 벽기둥, 신전의 조각 장식, 돔 구조의 지붕, 첨탑 지붕, 프랑스식 망사르드 지붕 등이 일관성 없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국적 불명의 건축물이 탄생했다. 이런 현상은 실내 역시 마찬가지로, 그곳에는 채플홀, 그레이스홀, 프로방스홀 등이 있다. 특이한 건 실내에는 한국의 전통 양식도 만들어놓았다는 점이다.
이런 건물의 외관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근대화 과정에서 갖게 된 서양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다. 파티오나인, 스칼라티움, 더파티움, 노블발렌티 같은 웨딩홀의 이름에서도 잘 드러난다. 흔히 ‘캐슬’이나 ‘팰리스’, ‘~빌’ 같은 아파트 이름 뒤에 붙인 영어들, 럭셔리와 프레스티지를 합성한 ‘럭스티지’류의 상품 이름도 마찬가지다. 이런 네이밍과 건물 외관의 서양식 파편들은 모두 서양을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되었다. 웨딩홀은 그것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표지다. 따라서 다른 종류의 건물들, 호텔이나 백화점, 다세대주택, 각종 기능의 건물들에서 이런 현상은 흔하게 볼 수 있다.
▶어느 다세대주택 표면에 붙어 있는 고전 양식의 파편들
서울에서 시작된 이런 잡종 교배의 뷔페식 건축 디자인은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마치 논두렁 위에 벌떡 선 아파트처럼 지방 도시에서도 비슷한 뷔페식당 같은 건물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지방에서는 웨딩홀보다는 싸구려 호텔과 모텔에서 그런 서구에 대한 열망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다. 얼마 전 강릉과 속초를 다녀왔다. 그곳은 선교장과 오죽헌, 속초시립박물관의 실향민촌 같은 수준 높은 한국의 전통 건축문화를 자랑하는 도시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를 더욱 사로잡은 것은 서양식 건물을 흉내 낸 괴기스러운 모텔과 건물들이었다. 이런 종류의 건물이 어디 그 곳들뿐이겠는가. 어떤 곳에서는 렘 콜하스와 렌초 피아노의 세련된 건축을 만나고, 또 다른 곳에서는 대중의 환상을 무절제하게 좇아 만든 키치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서울의 인상이다.
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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