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라더니 말복, 처서를 지나면서 거짓말처럼 고공 시위 중이던 수은주가 하향 조정됐다. 상륙하기 전부터 온 나라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태풍 솔릭이 예상보다 가볍게 한반도를 통과하고 나니 때 아닌 비가 굵직굵직하게 쏟아진다. 내게는 빗소리가 최상급의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자율 감각 쾌락 반응)이다.
원고 작업을 하거나 음성 지원 되는 영상을 찾아볼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켜놓는 라디오도 비 오는 날에는 OFF로 둔다. 오로지 빗소리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빗소리야말로 아파트 숲에서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연의 소리가 아닐까 싶다. 늦여름 내내 앙칼지게 끓어대는 매미 울음소리는, 솔직히 그 짧고 강렬한 생애를 장히 여겨 참아줄 뿐이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비 오는 날과 빗소리를 좋아했다. 열일곱 살, 학교를 한 해 쉬던 해에는 베란다에 주룩주룩 떨어지는 빗소리를 60분짜리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두고 시도 때도 없이 들었다. 그리스 영화 ‘죽어도 좋아’(원제:페드라)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앞뒤로 녹음해두고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반복해 듣게 된 것도 그해 여름이었다. 흑백 화면 속 젊은 날의 멜리나 메르쿠리와 앤서니 퍼킨스를 스크린으로 볼 수 있게 된 건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서였다. 아슬아슬한 절벽 위 굽은 도로를 브레이크 없이 달리던 앤서니 퍼킨스의 광기와 절규 때문이었을까, 그즈음 녹음한 빗소리를 함께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비와 무관할뿐더러 오히려 나뭇잎 사이로 에게해의 햇살이 날카롭게 비쳐들던 마지막 장면에 깔리는 선율이지만, 그 OST를 들을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장대비가 퍼붓는 광경이 중첩되곤 한다.
스무 살, 생애 첫 자취방에서 들었던 빗소리도 손꼽을 만한 ASMR로 남아 있다. ㅁ자 주택이어서 철제대문을 밀고 좁은 마당에 들어서면 스케치북만 한 하늘이 올려다보였다. 그 집의 모든 방들은 작고, 천장이 낮았다. 장마철이면 작살처럼 내리꽂히는 빗소리가 마치 내 몸을 뚫고 들어오는 듯했다. 시멘트 마당, 수돗가의 세숫대야, 개량기와를 인 지붕, 처마에 덧댄 슬레이트 차양…… 빗발이 부딪는 지점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음향을 내던 빗소리의 합주를 어찌 잊을까.
훌쩍 나이 들어 자동차가 생기고는 우중(雨中)의 호숫가를 찾곤 했다. 운전석에 그대로 앉아 보온병에 챙겨온 커피를 마시며 비안개에 잠긴 호수를 바라보노라면 그 쓸쓸하고도 쌉싸래한 자유가 한없이 소중하고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자동차 지붕에서 타닥타닥 튀어 오르던 빗소리는 또 얼마나 통렬하던지.
비 오는 날의 드라이브를 좋아해서 폭우 속을 달렸던 적도 자주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와이퍼 사이로 시계는 불량하기 그지없었지만, 나는 빗속의 질주를 몹시 즐겼다. 물론 다 지나간 한때의 이야기다. 이미 여남은 해 전에 자동차도 없앴거니와, 그때처럼 이따금 주체할 길 없이 치솟던 열기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이가 들면 차분해진다, 현명해진다 말들 하지만 실은 게을러지는 것이며, 객쩍은 혈기가 잠잠해지는 것이리라.
기상 관측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폭염, 크고 작은 태풍 그리고 연이은 기습폭우로 수확을 망친 농어촌의 시름이 깊어간다. 자연재해로 고통을 당한 이들을 위무해줄 손길도 아쉬운 마당이다. 추석을 앞두고 장바구니물가를 걱정하는 소비자의 마음도 심란할 테다. 빗소리를 반가워하는 내심을 드러내기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음에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송구하다.

정길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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