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싫을 리 있겠나. 하나 꽃다발을 선물로 받게 되는 건 좀 부담스럽다. 솔직히 반갑지 않다. 꽃보다 더 꽃인 체하는 포장지가 못마땅하고, 그걸 한 겹 한 겹 풀어헤치는 과정이 생각보다 꽤 번거롭고, 그렇게 수북하게 쌓인 포장재를 처리할 일이 지레 성가신 까닭이다. 잘 썩지도 않을 폐기물을 쓰레기봉투에 꾹꾹 눌러 담을 때는, 낯간지럽게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아니 떠올릴 수 없어 혼잣말을 한다. 미안해, 지구야.
꽃 선물이 썩 반갑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지 않나. 나무나 초본에 붙어서도 길어야 열흘 남짓 찬란했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것이 꽃의 일생이다. 가위에 싹둑 잘려 화병으로 옮겨지면 수명이 더 줄 수밖에 없다. 처음의 화사함과 싱그러움은 고작해야 사나흘이다.
나만 그런가, 원래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시들어가는 꽃과는 달리 화병에서 시드는 꽃은 영 추레하다. 모든 생명이 죽음을 잉태하고 있다는 걸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가지만, 정점에서 추락까지, 직접 목도하는 꽃의 생애는 실감나게 짧다. 인위적이기에 폭력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내게 한아름 꽃을 안겨준 사람의 마음을 어찌 모른다 하랴. 그 예쁜 마음만은 백번 고맙다. 꽃다발 대신 나같이 게으른 주인을 만나도 백 일쯤 버텨주는 화분이었다면 백 번씩, 백 번은 고마워했으리라.
식탁 위에서 시드는 꽃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흙에 뿌리를 내린 제 몸뚱어리에서 뚝뚝 절로 지는 꽃은 처연한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킨다.
익숙한 산책길에서 만나는 나무들은 저마다의 시간표대로 잎을 틔우고 꽃을 연다. 잎보다 꽃을 먼저 여는 나무도 있다. 대개는 쌩한 바람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이른 봄의 나무들이다. 매화, 생강나무, 진달래 같은.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 잎과 꽃이 끝내 만나지 못하는 초본도 있다. 잎 진 뒤 꽃대 올라오는 상사화, 꽃 지고 잎 돋는 꽃무릇은 마음앓이만 할 뿐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만 같아서 애절하고 애틋하다.
자연 속의 꽃들은 지는 모습도 아름답다. 가지나 대궁 끝에 매달려 야위어가는 통꽃도 있고, 고요히 낙하해 양탄자처럼 바닥을 뒤덮는 갈래꽃도 있다. 봄비가 한차례 지나간 4월이나 5월의 오솔길에는 하르르하르르 흩어져 내린 산벚나무 꽃잎이 바닥을 하얗게 수놓는다. 산벚꽃 자취가 없어질 즈음이면 빛바랜 색감의 아까시꽃이 착지한다.
월동하는 꽃 동백은 단정한 모습 그대로 툭 떨어져 사람의 간장을 철렁철렁 흔들어놓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낙화의 풍경은 장마철의 능소화와 석류나무 꽃 진 자리. 물빛 공기를 단박에 환기시키는 선연한 다홍과 진홍은 오래도록 잔상이 남는 영화처럼 고혹적이다.
꽃은 한 송이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수십 수백 송이 꽃밭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들판의 풀들도, 숲의 나무도 모여서 아름답다. 군거(群居)의 묘(妙), 무리지어 사는 삶의 아름다움이랬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창백하다. 사람은 ‘늘’ 아름답지 않고, 더욱이 ‘모여서’ 아름다워지기는 어렵다. 사람은 언제나 풀리지 않는 숙제다.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내게는 질문과도 같은 노래다. 어쩌면 노래에 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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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연│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