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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양혜규 전시 중 김우희 목수의 숟가락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양혜규 작가의 전시를 보다가 아주 흥미로운 작품을 발견했다. 그것은 양혜규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그가 아는 목수인 김우희의 작품이다. 김우희 목수는 숟가락을 만든다. 숟가락? 숟가락이 미술관에 전시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숟가락은 기능적인 사물이다. 숟가락은 사람들이 매일 삼시세끼 사용하는 흔하디흔한 도구일 뿐이다. 그 숟가락을 최고의 장인이 최고 기술로 오랜 시간 정제해서 만들어도 그저 숟가락이다.
금이나 은 같은 값비싼 재료로 만들어도 숟가락이다. 고급스러운 장식을 해도 숟가락이다. 아무리 특별한 재료와 기술로 만들어도 일상의 쓸모에 봉사하는 한 그것은 숟가락일 뿐이다. 숟가락은 문턱 높은 미술관의 문을 통과할 수 없다. 물론 오래된 숟가락, 고대 로마나 삼국시대의 숟가락은 유물로서 박물관에 소장되고 전시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만들어지는 숟가락은, 그것이 고가의 공예품이라 해도 미술관의 전시품이라는 지위에 오르기는 결코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회화와 조각 없이도 사람들은 살아가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 하지만 숟가락이 없다면 어떨까? 국과 찌개가 있는데,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이 없는 밥상을 마주한다면, 당혹스러울 뿐만 아니라 식사 자체가 대단히 힘든 과정이 된다. 예술 작품 없이도 밥을 먹거나 일을 하거나 잠을 자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 반면 각종 식기와 일상의 도구, 가구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그토록 고맙게 우리를 돕는 기능적 사물들은 사실 미술관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 평범하고 지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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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뉴욕 현대미술관의 <기계 예술>전,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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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다리미’, 만 레이, 1921년
숟가락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는 까닭
그렇게 평범하고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숟가락 따위의 기능적 사물이 어떻게 진입장벽 높은 미술관의 까다로운 문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 사실 비결은 단순하다. 쓸모를 포기하는 것이다. 기능적 사물과 예술품을 나누는 기준은 바로 ‘쓸모’다. 예술 작품은 한결같이 실용성이 없다. 숟가락이 식사를 위해 봉사한다는 뚜렷한 목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과 달리 예술 작품, 특히 현대의 예술 작품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목적을 갖는 기능적 사물도 그것의 본분을 상실하면 예술 작품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작은 기회가 생긴다.
초현실주의자인 만 레이가 1921년 흔하디흔한 다리미의 바닥에 못을 심었다.(사진 3) 바닥에 못이 달린 다리미는 더 이상 쓸모없는 사물이 되었다. 그렇게 쓸모를 상실하자 예술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의 복제품이 뉴욕의 현대미술관, 런던의 테이트 모던 등에 소장되어 있다. 2000년에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디자인 혹은 예술>이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이때 김범 작가의 ‘임신한 망치’라는 작품이 출품되었다.(사진 6) 이 망치는 임신을 함으로써 쓸모가 없어졌는데, 바로 그런 이유로 미술관 전시품이 될 수 있었다.
다른 방식으로 미술관의 출입 허가를 받은 경우도 있다. 그것은 기능적인 사물을 파편적으로 해체해서 쓸모를 없애버리는 경우다. 미술관이 순수미술이 아닌 디자인된 사물을 전시한 대표적인 초기 사례로 꼽는 것이 뉴욕 현대미술관의 1934년 전시인 <기계 미술>전이다.(사진 2) 이 전시에는 비행기의 프로펠러, 배의 모터 프로펠러, 또 기계 속에 있는 거대한 볼 베어링 등을 따로 떼어내어 전시장에 갖다 놓았다.
이렇게 실용적인 사물에서 분리되고 해체된 부품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것의 실용적 쓸모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대신 실용성과 무관해진 형태와 질감, 비례와 마감 상태만을 감상하도록 한다. 실용성과 무관해졌다는 건 순수해졌다는 것이다. 마치 추상 조각처럼 된 것이다. 일반인도 가끔 그런 경험을 한다. 예를 들어 모던 의자의 걸작 중 하나인 개미 의자의 등받이를 보면서 그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움에 취할 수 있다.(사진 5) 그때 그 등받이는 실용성에서 벗어난 순수하고 아름다운 형태로 환원되는 것이다.
실용성을 제거하면 디자이너 또는 예술가는 형태나 색채, 질감, 비례 그리고 전체적인 조합과 구성을 좀 더 자유롭게 구상할 수 있다. 1990년대에 개최된 <신데렐라의 복수>라는 전시회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디자인한 구두를 전시했다.(사진 4) 이 전시에 출품된 구두는 한결같이 독특하고 재미있고 상징적인 성격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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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신데렐라의 복수> 전시에 출품된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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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개미 의자를 찍은 남종현의 사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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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 ‘임신한 망치’, 김범, 1995년
쓸모가 없어서 쓸모가 생기는 역설
이렇게 흥미로운 구두가 디자인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작가들이 그것을 정말로 신을 수 있는 신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의 크기를 고려하거나 무게를 지탱할 내구성 등에 대해 추호도 염려하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 감상되는 일종의 조각품으로 그것을 디자인한 것이다. 그 결과 환상을 창조할 수 있었다.
양혜규 전시에 출품된 김우희 목수의 숟가락이 딱 그랬다.(사진 1) 그 숟가락들은 어떤 것은 구멍이 뚫렸고 각이 졌으며, 어떤 것은 손잡이가 짧거나 휘어졌다. 한마디로 쓸모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숟가락들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비범해 보인다. 각각의 형태가 고유하고 독특하며 흥미롭다. 그것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강한 매력을 느꼈다. 이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예술인 것이다. 작가는 이런 숟가락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모아둔 나무토막을 펼쳐놓고 손에 잡히는 대로, 나무 모양 생긴 대로 숟가락만 팠다. …술날이 꼬인 놈, 술잎에 구멍이 뚫린 놈, 술목이 꺾인 놈, 술자루가 휜 놈, 술총이 살갗을 뚫을 듯 뾰족한 놈. 그러고 보니 그해 겨울 다듬은 숟가락은 어느 하나 반듯한 것, 쓸 만한 것,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무용지용(無用之用) 네 글자를 위안으로 삼아본다.”
장자의 무용지용은 쓸모가 없어서 쓸모가 생기는 역설을 말한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오스카 와일드는 쓸모없음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무용한 사물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단 하나의 구실은, 우리가 그것에 강렬히 찬탄한다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상당히 무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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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