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나는 이야기의 힘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힘들 때마다 나를 일으켜준 것은 아름다운 이야기의 위로일 때가 많았다. 천애고아로 자랐으면서도 외로운 마릴라와 매튜에게 오히려 ‘외롭지 않은 세상, 함께 있어야만 더욱 아름다운 세상’을 선물해주는 빨강머리 앤, 아무도 그녀를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는 상황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는 제인 에어, 키다리 아저씨에게 다정하고 사려 깊은 편지를 보냄으로써 외롭고 삭막한 고아원의 아픈 기억에서 스스로 해방되는 주디스에 이르기까지. 감동적인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나보다 더 어렵고 혹독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음으로써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주체적인 길을 택했다.
요새 나는 <아라비안나이트>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서맨사 엘리스의 <여주인공이 되는 법>이라는 책을 읽으며 셰에라자드야말로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는 저자의 이야기에 커다란 인식의 전환을 느꼈다. 셰에라자드는 처음부터 이야기의 여주인공이 될 만한 ‘배경’을 지니고 있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험난한 길을 택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여성을 구해냄으로써 자기 스스로 여주인공을 ‘창조’해낸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셰에라자드의 성장 스토리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 같았다. 그녀는 궁정 대신의 딸이라는 것밖에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처음에는 전혀 영웅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여성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샤리야르왕이 왕비의 불륜을 알게 되어 왕비를 살해한 지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왕은 여전히 왕비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매일 밤 처녀와 결혼해 순결을 빼앗고 아침에 죽이는 만행을 반복했다. 셰에라자드의 아버지는 바로 그 처녀들을 물색해 ‘하룻밤 왕비’로 만드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나라 안의 처녀들이 다 죽거나 도망을 가서 더 이상 새로운 처녀를 찾을 수 없다는 아버지의 한탄을 듣게 된다. 바로 이때 셰에라자드의 잠재된 용기가 폭발한다. “아버지, 그런 끔찍한 일이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저는 방금 임금님과 여자들을 모두 파멸에서 구해내는 비책을 생각해냈어요. 다만 그것은 제가 임금님과 결혼을 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셰에라자드는 살인이 습관이 돼버린 미친 왕에게 매일매일 혼을 쏙 빼놓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를 딛고, 자신의 목숨을 살려냄과 동시에 왕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를 바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펼쳐놓는다. 왕이 여성에 대한 삐뚤어진 시선을 거두기를 바라며, 그리고 도탄에 빠진 이 왕국의 모든 여성을 살리기 위해. 셰에라자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무력한 피해자가 아닌,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펼쳐놓는 주체로서 거듭난다. 모두가 ‘죽을 자리’를 발견할 때, 그녀는 ‘삶의 자리’를 발견한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온 세월 동안 남몰래 갈고 닦은 진정한 이야기꾼의 재능, 예술가이자 창작자이자 작가의 재능을 발휘할 ‘아레나(arena)’를 발견한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평범한 ‘누군가의 딸’에서 ‘모두를 구원하는 영웅’으로 거듭난다. 이야기의 힘으로, 언어의 힘으로, 마침내 타인의 슬픔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아파하는 아름다운 마음의 힘으로.

정여울│작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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