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墨子, BC 468경~BC 376경)는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자로, 본명은 묵적(墨翟)이다. 묵자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송나라 출신이라고도 하고 노나라 출신이라고도 한다. 대체로 공자의 고향 인근에서 태어났다고 추정되고 있다. 묵자의 집안은 무사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묵자를 따랐던 제자들 중에도 무사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묵자는 주나라 관리였던 사각의 후손에게 글을 배웠다. 묵자는 공자의 사상 또한 배웠다. 묵자와 공자 사이에는 시간적 차이가 크지 않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쯤 지났을 때 묵자가 태어났다. 그런데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은 사뭇 달랐다. 공자가 활동했던 시대를 춘추시대라 하고, 묵자가 활동했던 시대를 전국시대라고 한다. 즉, 공자는 춘추시대 말기에 활동했고, 묵자는 전국시대가 시작되던 시기에 활동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차이는 표면적으로는 주나라의 존재 여부였다. 춘추시대에는 주나라가 존재하는 가운데 형식적이나마 주나라와 주종관계를 맺고 있던 제후들이 다투었다. 반면 전국시대에는 주나라가 사라지고 7개의 나라가 패권을 잡기 위해 다투었다.
전쟁의 규모도 달라졌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무사 집단 위주의 소규모 전쟁이었고, 그래서 하루 사이에 전쟁이 끝나곤 했다. 그러나 전국시대가 되자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수만에서 수십만 명의 병사를 동원해 싸우는 대규모 전쟁이 일어났고, 몇 년간 전쟁이 이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전국시대에는 인명피해 규모가 엄청 커졌고, 전쟁의 양상 또한 매우 잔인해졌다. BC 260년에 있었던 진나라와 조나라의 전쟁에서는 진나라 대장 백기가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 40만 명을 생매장하기도 했다.
전국시대에 제자백가라고 불리는 수많은 사상가가 나타났다. 사상가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사상을 전파했다. 다행히도 사상가들을 처형하는 나라는 없었다. 오히려 각 나라의 왕들은 사상가들을 초빙해 의견을 듣고자 했다. 패권을 잡기 위해 사상가의 지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묵자는 전국시대에 나타난 최초의 사상가였다. 당시 공자의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공자의 제자 중에는 특출한 사상가가 없었다. 공자의 제자들은 상당수가 학문보다는 관직에 진출해 있었다. 그 덕분에 공자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퍼졌지만, 공자의 뒤를 이을 학자는 나오지 않았다. 공자의 뒤를 잇는 특출한 사상가인 맹자는 묵자가 세상을 떠나고 3~4년이 지나 태어났다.
묵자는 처음에는 공자의 사상을 배워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자의 사상이 미흡하다고 생각했고, 이후 공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묵자는 어디에서 공자와 갈라졌을까? 묵자는 공자 사상의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인(仁)’에 대해 비판했다. 공자는 ‘인’을 풀이해 ‘애인(愛人)’, 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묵자는 공자의 ‘인’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묵자는 공자의 ‘인’을 차등적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부모에 대한 사랑이 가장 소중하다고 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랑이 똑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관계가 먼 사람에 대한 사랑은 같을 수가 없다. 묵자는 공자가 그런 식으로 차등적인 사랑을 주장했다고 생각했다.
묵자는 대안으로 ‘겸애(兼愛)’, 즉 모든 사람들에 대한 동등한 사랑을 제시했다. 묵자가 겸애를 주장한 것은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있다. 묵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제후들은 자기 나라만 사랑할 뿐 남의 나라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남의 나라를 공격한다. 천하의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강자는 약자를 억누르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업신여긴다. 귀족은 천민을 오만하게 대하고, 영악한 자는 어리석은 자를 속인다.”
전쟁이 일어나고 강자, 부자, 귀족이 약자, 가난한 자, 천민을 깔보고 무시하며 억누르는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을 없애고 억압을 없애려면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런 사랑이 곧 ‘겸애’다.
사실 묵자의 겸애와 공자의 인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공자는 부모에 대한 사랑만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자는 부모에 대한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공자의 ‘인’은 묵자의 ‘겸애’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묵자가 공자를 비판한 이유는 실천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인을 예로 들어보자. 공자와 묵자는 모두 성인에 대해 말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공자는 완전한 도덕성을 갖춘 인물을 성인이라고 한 반면, 묵자는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 성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대표적인 성인이라 불렸던 요와 순에 대해 공자와 묵자의 강조점은 달랐다.
요와 순은 고대 중국의 사상가들이 이상적인 임금으로 칭송했던 인물들이다. 공자는 요와 순이 바람직한 도덕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성인이라고 했다. 반면, 묵자는 요와 순이 통치를 잘했기 때문에 성인이라고 했다. 이런 평가의 차이는 근본적인 것의 차이 때문이다. 묵자는 무엇보다도 실질적 실천을 중요시했다.
하나라의 우임금에 대한 평가에서 묵자의 사상이 잘 드러난다. “옛날 우임금이 홍수를 막기 위해 양쯔강과 황허강을 다스려 사방이 통하게 했다. 우임금은 손수 삼태기와 따비를 들고 천하의 하천을 뚫어 모든 하천이 모이게 하느라 정강이와 장딴지의 털이 다 닳았다. 소낙비에 목욕하고 사나운 바람에 빗질하며 나라를 안정시켰다. 위대한 성인이신 우임금은 천하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우임금 역시 성인으로 칭송받는 임금이었다. 묵자가 우임금을 칭송한 이유는 나라를 위해 손수 육체노동을 하고, 백성을 위해 정강이와 장딴지의 털이 다 닳아빠질 정도로 일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묵자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임금이 성인이라고 했다.
묵자는 실천가로서 널리 인정을 받았다. 중국 전한시대 역사가인 유안(劉安)은 <회남자>에서 “묵자를 따르는 제가가 180명에 달했다. 제자들은 묵자에게 감화되어 불속에 뛰어들거나 칼날을 밟으라는 명령에도 따랐다”고 했다. 묵자의 제자 집단은 오늘날로 보면 일종의 정치적 결사체라고 할 수 있다. 묵자는 제자들에게 “칡베 옷 입고 짚신을 신더라도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을 하라”며 실천을 강조했다.
맹자는 이런 묵자의 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일생의 과제 중 하나가 묵자의 사상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럼에도 맹자는 묵자의 실천적 삶을 칭찬했다. “묵자는 겸애를 주장하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자신의 온몸이 다 닳도록 천하의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하려고 했다”고 했다.
묵자는 절용(節用), 즉 근검절약을 또한 강조했다. 필요한 만큼만 생산해 낭비를 줄이고 검소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묵자는 지도층의 소박한 삶을 강조했다. 지도층의 사치를 줄이는 대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사회 현실을 보면 겸애와 절용의 정신이 더더욱 절실하다. 그 어느 때보다 다 함께 행복하기 위한 토론과 실천이 필요한 때다. 묵자의 ‘겸애’를 다시 생각해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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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기│<한국 철학 콘서트>, <철학자의 조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