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좀 더 적극적으로, 외향적으로, 능동적으로 살아라”라는 권유를 들어왔지만 그것은 왠지 나와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져서 괴로웠던 적이 있는가. 많은 사람이 자신의 내향성을 ‘숨겨야 할 결점’이나 ‘외향성에 비해 열등한 무엇’으로 생각해왔을 것이다. 나는 “넌 너무 내성적이야, 도무지 속을 모르겠구나”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내성적인 성격과 예민한 감수성이 살아가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편견 속에 오랫동안 자신을 가뒀다. 하지만 글을 쓰고 살아가면서 비로소 내 안의 내향성과 예민한 감수성이야말로 창조성의 원천임을 깨닫는다. 길을 잃어버렸을 때도 남에게 길 묻는 것이 부끄러워 더 심하게 잃어버리곤 했던 나. 이런 지독히 내성적인 성격이 싫었지만, 지금은 내 안의 내향성과 조금씩 화해하고 있다. 외부 소식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내 안에서 들리는 온갖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 익숙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는 감정기복 때문에 힘들긴 하지만 이런 내 안의 복잡성이 끝없이 피어오르는 아이디어의 원천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내향성과 외향성은 흑백논리처럼 또렷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흥미롭다. ‘넌 너무 내성적이어서 이런 일은 못할 거야’라는 자기 징벌에 익숙한 나도 때로는 외향적일 때가 있다. 사람들이 자기 안에 숨은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한없이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면 내 눈에서는 갑자기 불꽃이 일어나면서 ‘저 사람의 재능을 세상 밖으로 펼칠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는 강한 열정이 샘솟곤 한다.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때의 나는 매우 적극적이다 못해 심하게 외향적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한편, 집 바깥에서는 매우 명랑하고 활발해서 어딜 가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자기 안의 동굴 속으로 깊이 숨어드는 경우도 있다. 내향성과 외향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개인의 인격 속에 공존하는 두 얼굴일 수 있다. 우리가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가는 데는 내향성과 외향성이 모두 필요한 것이 아닐까.
팀플레이를 할 때도 꼭 외향성과 적극성만이 좋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들 서로 앞 다투어 자기표현을 하느라 외면적인 요소에 치중할 동안, 내향적인 사람들은 심각하고 진지하게 문제 자체를 다시 관찰하며 ‘어쩌면 처음부터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이 기획에서 우리가 달성해야 할 진정한 목표는 무엇일까’를 숙고한다.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는 누구에게든 낯을 가리지 않고 길을 물을 수 있는 외향성과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때조차도 나 스스로 내 문제를 심사숙고해 성찰할 수 있는 내향성이 동시에 필요하다. 평소에 스스로 내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외향성과 적극성’을 개발할 용기가 필요하고, 늘 자신이 외향적이고 적극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에 신경 쓰느라 놓쳐버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신경 써야 한다. 수줍은가 하면 어느 순간 깜짝 놀랄 만큼 저돌적인 사람, 할 말 다 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호수처럼 잔잔한 눈빛으로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 이렇듯 내향성과 외향성을 동시에 갖춘 사람들이 진정으로 풍요롭고 행복한 삶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정여울│문학평론가. <내성적인 여행자>,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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