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그렇지만, 소설에서도 유독 마음을 당기는 공간적 배경과 마주할 때가 있다. 주인공의 내면이나 사건의 전개보다 등장인물의 동선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인데, 춘원 이광수의 소설 <유정>이 그런 경우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에게는 금지돼온 루트이기에 그 길 위의 풍경들이 더욱 핍진하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정>의 주인공 ‘최석’은 도쿄에서 경성으로 돌아온 식민지 지식인이다. 그는 도덕성을 의심받는 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북방으로 가는 열차에 오른다. 경성역에서 신의주를 거쳐 홀연히 조선 땅을 벗어난 그는, 만주를 경유해 하얼빈에 이르렀을 것이고, 그곳에서 치타행 열차를 갈아탔을 것이다. 그리고 치타에서 한 번 더 철도 노선을 바꿔 대륙횡단열차에 고단한 몸을 실었을 것이다.
횡단열차가 서쪽으로 600km를 더 달려 이르쿠츠크에 당도할 때까지, 그는 거의 뜬눈으로 덜컹거리는 바퀴의 진동에 몸을 맡겼으리라. 차창 밖으로는 아득한 설원이 펼쳐졌을 것이고, 휙휙 밀려나는 자작나무들처럼 삶의 근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자신을 뼈아프게 감각했을 것이다.
그의 여정의 종착지는 이르쿠츠크 인근의 바이칼 호수. 어쩌면 그에게는 세상의 끝이었을 낯선 장소. 그를 세상의 끝으로 내몬 진짜 이유는 세간의 손가락질이 아니었다. 그 자신의 정념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시베리아의 눈 덮인 광야에서 오히려 더욱 선명해지는 정념의 실체와 맞닥뜨렸다. 번민은 결국 그의 육체를 무너뜨렸다. 그의 흔적을 좇아 같은 길을 달려온 순결한 정인(情人)과 딸과 친구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의 끝에서 지상의 삶을 마감했다.
<유정>은 이광수가 친일로 돌아서기 전, 1930년대 초반에 씌어졌다. 춘원이 그저 상상만으로 시베리아의 광활한 풍경을 묘사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이 밟았던 길을 앞서 밟았으리라. 그때만 해도 북방으로 가는 육로가 열려 있었다. 우리 문학의 시공간이 만주와 몽골과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던 시절이었다.
분단으로 남한은 육지의 섬으로 고립되었다. 남쪽 항구도시에서 시작된 철로는 휴전선에서 끊어졌다. 게다가 냉전체제가 무너지기 전인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중국과 소련 또한 장벽 너머의 나라였다. 비단 이광수의 소설뿐 아니라 또 다른 문학작품 속 북간도와 만주는 텍스트에 갇힌 미지의 공간이 되고 말았다.
도스토옙스키와 파스테르나크를 읽으며 감수성을 키워온 나 또는 나의 세대에게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러시아 횡단열차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현재는 러시아와 중국 여행이 자유롭지만 여전히 북한 땅을 건너뛰고서야 가능한 미완의 루트다.
10년 전쯤, 러시아 횡단열차의 일부 구간을 이용할 기회가 있었다. 직항 항공편으로 호반의 도시 이르쿠츠크까지 올라가서 노보시비르스크 방향으로 32시간 정도를 달리는 것으로 오랜 로망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었다. 아직 한반도를 관통해 대륙의 서쪽 끝, 유럽에 닿는 꿈은 시기상조다.
지난봄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뒤로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전 구간을 주파하는 꿈이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나만의 꿈이 아닐 것이다. 문학적 공간의 확장과 함께 현실의 공간이 드넓어지는 상상은, 그 상상만으로도 숨통이 확 트이는 것 같다.

정길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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