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진료카드를 작성하던 중이었다. 담당직원이 물었다.
“비상연락처로, 본인 말고 다른 분 전화번호 하나 불러주시겠어요?”
대수롭지 않은 주문이었음에도 그 짧은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비상연락처라? 뜻밖의 사태에 처했을 때 그 사실을 맨 처음 알릴 만한 누군가가 누구지?
살아오면서 예기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렸던 적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 즉시 누군가에게 긴급히 연락을 취했던 기억은 딱히 없다. 상황이 종료됐거나 웬만큼 적응된 다음 하소연 섞인 수다를 떨곤 하는 상대야 더러 있지만.
물론 질문을 받자마자 아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아들은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제외됐다. 한 집에 살고 있지도 않은 아들이다. 전화도 제꺽제꺽 받지 않는 무뚝뚝한 아들에게 연락이 간들 곧바로 접속이 되리란 보장이 없다. 무엇보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 살기도 힘겨운 청춘이 해준 것 없어 늘 미안하기만 한 엄마의 일로 신경 쓰는 게 싫었다. 그것이야말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동서남북 제 갈 길로 흩어져 고군분투하는 동기간의 이름들 중 하나를 들먹이기는 더더욱 내키지 않았다. 혈연이 강요하는 끈끈한 연대의식이란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강박관념일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상처를 최소화할 적정 거리가 필요하다. 비록 한 부모 밑에서 올망졸망 커온 동기간일지라도.
“꼭 가족이어야 하나요?”
“그렇진 않고요, 긴급히 연락할 일이 생겼을 때 수신 가능한 번호면 됩니다.”
비교적 가깝다고 여기는 몇몇 지인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가깝다고는 해도 가족도 아닌 처지에 낯선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아야 할 때의 난감함이 그려졌다.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다고 내다보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그들에게 전화가 가는 실례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리자 데스크 너머 직원이 답답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형식일 뿐인데 뭘 그리 진지하게 고민하느냐는 반응이었다. 나는 휴대전화의 주소록에서 이름 하나를 골라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엉겁결에, 당사자의 사전 승인도 없이.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주고받으며 살갑게 지내온 O의 전화번호를 병원 서류에 올리고 나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족보다 친숙한 타인과, 타인보다 불편한 가족에 대해.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용인되는 온갖 침해와, 타인이기에 가능한 실용적인 소통에 대해.
나중에, 자신도 모르는 새 나의 비상연락처가 돼버린 O는 흔쾌한 수락과 함께 이렇게 되물었다.
“만약에 진짜 혼자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길 땐 어쩌나요?”
O의 물음은 그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서울연구원이 발표한 2016년 기준 1인 가구의 비율이 30.1%라고 하니, 나나 O가 속한 프리랜서 직업군의 1인 가구 비율은 그보다 좀 더 높으리라. 하고 많은 그 1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얼굴은 가족일까, 타인일까.
“비상연락망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보루는 긴급구호 시스템일 테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다는 건 지루하고 쓸쓸한 일이다. 아무래도 그렇다.
정길연│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