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는 권력투쟁에 치여 비극적으로 사라져간 여성들이 많다. 서양미술사에는 이런 비극을 그린 그림이 적지 않은데,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가 그린 ‘제인 그레이의 처형’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살롱 전에 내걸려 큰 격찬을 들은 이 그림은 역사의 비극과 어린 소녀의 비운을 사실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붓으로 생생히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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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들라로슈, ‘제인 그레이의 처형’, 1843, 유화, 런던 내셔널갤러리
제인 그레이(1537~1554)는 영국 왕 헨리 7세의 증손녀다. 에드워드 6세가 후사 없이 죽자 당시 세도가였던 제인의 시아버지가 주도해 열다섯 살의 제인을 왕좌에 앉혔다. 제인은 왕좌에 대한 욕심이 없었으나 얼떨결에 여왕이 돼버렸다. 에드워드 6세의 배다른 누나로 왕위계승권이 우선적으로 있다고 생각한 메리(메리 1세)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보다 우세한 자신의 세력과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메리는 9일 만에 권좌를 빼앗았다. 졸지에 여왕에서 반역자로 전락한 제인은 1554년 2월 17일 런던탑에서 참수를 당함으로써 열여섯 해의 꽃다운 삶을 마감했다.
당시 제인의 처형은 여러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녀 자신이 권력을 탐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뛰어난 지성과 착한 심성을 지닌 아가씨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리는 후환을 없애야 했다. 그렇게 제인은 제거되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제인. 드레스의 흰색은 그녀의 순결함과 고귀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드레스는 곧 붉은 피로 얼룩질 것이다. 그녀의 처형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수발을 들던 시녀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주저앉은 여인의 무릎 위에는 제인의 목걸이와 패물이 들려 있다. 처형의 책임을 맡은 관리는 눈을 가린 제인을 부축해 참수대 앞으로 이끈다. 그의 표정과 자세에도 지극한 동정심이 배어 있다. 그만큼 감상적인 정서가 뚜렷한 그림이다.
매우 불운한 죽음이었지만, 제인에게는 생을 마감하는 이 순간이 어쩌면 비로소 모든 삶의 고통과 고뇌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 “나의 불운한 날들을 끝마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녀는 짧은 생을 사는 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다. 워낙 착하고 온순했던 그녀는 바로 그 이유로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학대를 당했다. 어머니는 잔인하고 오만한 귀부인으로, 딸이 지나치게 착하다고 생각해 정기적으로 매질을 했다. 그게 딸을 강하게 키우는 길이라고 믿었던 탓이다. 아버지도 매정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정치적 야심으로 정략결혼을 추진해 세도가 노섬버랜드 공작의 아들과 결혼시켰다. 이때 독신으로 살고 싶다고 애원하던 그녀를 어머니가 강제로 내쫓았다. 그 뒤 왕위에 올라 결국 이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이 그림을 마주한 19세기 파리의 관객들은 특별히 애잔한 시선으로 그림을 봤다. 18세기 말 대혁명 이래 끊이지 않은 격동으로 많은 사람이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장면을 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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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리야 레핀,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황녀’, 1879, 유화, 트레티야코프미술관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의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황녀’도 권력 무상의 허망한 정서가 철철 넘쳐흐르는 그림이다. 그림 한가운데는 분노와 허탈, 복수심으로 활활 타오르는 황녀가 있다. 표트르 대제의 누나인 소피아 황녀(1657~1704)다. 소피아는 동복동생 이반과 이복동생 표트르가 공동 차르가 된 1682년, 아직 어린 그들을 대신해 섭정이 되었다. 7년간 러시아를 통치한 그녀는 스스로 차르가 되려고 세를 일으켰다. 그러나 표트르에게 꺾여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유폐되고 말았다. 소피아는 1704년 47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15년 동안 이 수녀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측근과 친위대원 1700여 명이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가운데 세 명은 그녀의 처소 바로 밖에서 처형됐는데, 화가는 그림 창밖에 주검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 소피아가 왜 이리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짐작하게 하는 묘사다.
원제목이 ‘1698년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감금된 지 일 년 뒤의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황녀, 그녀의 친위대가 처형당하고 시녀들이 모두 고문당하고 있을 때’인 이 작품에서 우리는 요동치는 역사의 단면을 마치 현장에서 보는 듯 생생히 대면하게 된다. 시뻘게진 황녀의 눈자위가 주는 섬뜩함이나 어둡게 가라앉은 실내의 음산함, 황녀를 바라보는 어린 시녀의 두려워하는 눈빛 등이 마치 눈앞의 일인 양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행하면서 표트르 대제는 백성들로부터 ‘처형관 차르’라는 별명을 얻었다.
우리 속담에 “죽은 정승이 살아 있는 개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무수한 사람들이 그 치열한 각축전 속에서 저승길을 재촉했던 것일까?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이 그 틈바구니에서 희생된 것일까? 투쟁과 희생의 역사는 이처럼 여성의 피도 요구했다. 이런 그림을 보노라면 어쩌면 절대 권력의 자리는 가난한 이의 초가삼간만도 못한 자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헬레니즘 제국을 세운 알렉산드로스 황제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당신이 지금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비켜달라”고 했다는 디오니소스의 달관이 새삼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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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이주헌은 미술 기자를 거쳐 학고재 관장을 지냈다.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내 마음속의 그림>, <서양화 자신있게 보기>, <이주헌의 아트카페>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