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덕(1489~1546)은 조선 중기의 철학자다. 송도(지금의 개성)의 화담이란 곳에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화담 선생’이라고 불렀다. 서경덕은 집안의 기대와 달리 벼슬을 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만을 했다.
서경덕은 어렸을 적에 과거시험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포기했다. 과거시험을 안 본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간곡히 부탁해 과거시험을 보아 사마시에 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과를 보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그만두고 나와버렸다.
벼슬을 할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실력자였던 조광조나 김안국이 여러 차례 서경덕을 추천했다. 그러나 서경덕은 모두 거절했다. 56세 때에는 중종이 ‘후릉참봉’이란 벼슬을 내렸다. 후릉참봉은 조선 제2대 임금 정종과 왕비 정안왕후의 무덤을 관리하는 명예직이었다. 서경덕은 이조차 받지 않고 정중히 사양했다.
제자들이 벼슬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서경덕은 시대가 맞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시대였기에 시대가 맞지 않는다고 했을까. 서경덕이 살았던 때에는 사화가 빈번히 일어났다. 사화란 정치투쟁으로 인해 수많은 벼슬아치와 학자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말한다.
서경덕이 어렸을 때인 연산군 시절에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등 두 차례의 사화가 일어났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중종은 연산군 시대의 폐정을 혁파하기 위해 인재를 등용했다. 그때 등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조광조였다. 그러나 조광조 역시 정치투쟁의 희생자가 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는 불과 38세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이런 정치적 격변에 영향을 받아 서경덕은 벼슬아치가 되는 길을 포기했다.
서경덕은 어렸을 적부터 남다른 탐구심을 보여주었다. 서경덕의 집안은 증조부, 조부 그리고 아버지가 모두 하급 무관직을 지낸 보잘것없는 집안이었다. 그래서 남의 땅을 빌려 소작을 하며 살았다. 서경덕은 어렸을 때부터 집안살림을 돕기 위해 바구니를 들고 나물을 캐러 다녀야 했다. 그러나 빈 바구니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부모가 그 이유를 묻자, 서경덕은 이렇게 말했다. “나물을 뜯다가 종달새 새끼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날에는 땅에서 한 치를 날더니 다음 날에는 두 치, 그다음 날에는 세 치를 날다가 차츰 하늘로 날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종달새 새끼가 나는 것을 보고 그 이치를 생각해보느라 나물을 캐지 못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자연을 관찰하고 스스로 그 이치를 깨닫고자 했던 것이다.
서경덕은 자득지학(自得之學)을 했다고 한다. 스스로 터득하며 학문을 했다는 말이다. 서경덕은 자신의 학문이 “모두 고심하며 전력을 다해 얻어낸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스승을 얻지 못해 공부하는 데 지극한 어려움 겪었지만, 후대 사람들은 나의 말을 따르면 공부하기가 나처럼 힘들지 않을 것이다”라며 자신의 학문에 자신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제자들에게도 “글자로 쓰인 내용은 옛 사람들의 생각의 찌꺼기에 불과하니, 진짜로 중요한 일은 스스로 알아내는 일이다”라고 강조하곤 했다.
서경덕이 독학을 한 이유는 집안이 가난해 스승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서경덕은 14세 때 선생을 모시고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서경(書經)>의 첫머리 ‘요전’ 편을 공부하는데, “일 년은 365일 여이니 윤달로서 사시(四時)를 정하고 해를 이룬다”는 구절이 나왔다. 양력으로 1년은 365일이고 음력으로 1년은 355일이기 때문에, 양력과 음력을 일치시키기 위해 윤달을 넣는다는 얘기다.
그런데 선생은 이 원리를 알지 못해 제대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서경덕은 보름 동안 스스로 탐구해 그 원리를 깨치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스승을 두지 않고 스스로 터득해가는 공부를 했다.
서경덕은 18세 때 <대학(大學)>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말을 발견했다. 격물치지란 ‘사물을 연구하여 앎에 이른다’는 말이다. 서경덕은 격물치지가 진정한 학문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이후 사물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다.
서경덕의 학습 방법은 독특했다. 서경덕은 “스무 살이 되면서부터 한 번 저지른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공부를 할 때에는 다른 요령을 부리지 않았다. 알고자 하는 사물이 있으면, 그 이름을 적어 방 벽에 붙여놓고는 사색과 관찰을 했다. 확실히 그 사물에 대해 깨달을 때까지 식음을 전폐한 채 연구했다.
이런 식으로 3년을 공부해 큰 통찰을 얻었다고 한다. “벽 위에 마도를 붙여놓고 3년 동안 들어앉아 공부를 한” 결과였다. 마도는 중국의 전설상 인물 복희씨가 세상을 다스릴 때 용마가 지고 나왔다는 문서다. 마도를 붙여놓았다 함은 우주만물의 원리가 연구 주제였다는 얘기다. 서경덕은 3년간의 연구 끝에 우주만물의 원리를 알아냈다고 자부했다.
서경덕은 자신이 알아낸 원리에 대해 한 시에서 이렇게 썼다. “바람이 지나간 뒤 달은 밝게 떠오르고/ 비 온 뒤 풀 냄새 향기롭다./ 하나가 둘을 타고 있는 것을 보니 물(物)과 물(物)이 서로 의지해 있구나./ 오묘한 낌새를 꿰뚫어 얻어 방을 비우고 앉으니 빛이 생겨난다.”
바람과 달, 비와 풀 냄새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했다. 바람과 달은 겉보기엔 전혀 달라 보이지만 모두 ‘기(氣)’이기 때문이다. 비와 풀 냄새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들도 모두 기이기 때문에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런 이치를 알면 밝은 빛, 즉 진리를 얻게 된다고 했다.
이런 통찰을 검증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30년 넘는 세월을 연구하며 자신의 통찰을 검증한 끝에, 마침내 57세가 되어서야 “천고의 의문을 풀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 <원이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 네 편의 짧은 논문을 썼다. 이 논문들을 작성한 이유에 대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논문들은 여러 성인들이 다 전하지 않은 경지까지 이해한 것을 담고 있다. 중간에 잃어버리지 않고 후세 학자들에게 전해주고 온 세상에 두루 알리면, 먼 곳이든 가까운 곳에서든 우리나라에 학자가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서경덕은 ‘우주만물이 기(氣)의 움직임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했다. 우주만물의 근원은 ‘기’이고, 기가 스스로 움직여 만물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기’가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의 기안에 대립하는 두 개의 기, 즉 양기와 음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경덕은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의 ‘기’라 했지만 하나는 이미 둘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는 둘을 생성하지 않을 수 없다. 둘은 스스로 생겨나지만 극복하여 다시 하나가 된다. 그래서 생성이 극복이고, 극복이 생성이다.”
하나에서 둘이 생겨나기 때문에 조화가 갈등으로 변한다. 둘은 다시 하나가 되므로 갈등이 조화로 변한다. 그러므로 조화가 갈등이 되고, 갈등이 조화가 된다. 조화와 갈등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화를 이루려면 갈등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갈등이 있는 곳에 조화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현실은 조화롭기도 하고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 현실을 이해해야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서경덕의 생각이었다. 그런 혜안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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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기│<한국 철학 콘서트>, <철학자의 조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