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햇살에 취한 것일까. 아니면 화사한 봄꽃을 즐기느라 잊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모든 것을 빨아들여버리는 블랙홀과 같은 대통령 선거에 정신이 팔려서일까. 눈처럼 내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벚꽃과 함께 4월이 지나갔다.
누군가 그랬다. 가장 놀기 좋은 계절은 곧 책 읽기에도 가장 좋은 계절이라고. 아니나 다를까,
4월 23일은 1995년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책의 날(책과 저작권의 날)’이었다. 책을 사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축제인 성 게오르기우스의 날이자, 기이하게도 스페인의 대문호 세르반테스와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1616년 동시에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굳이 이런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올해도 이날은 화창한 봄날이었고, 아직 철쭉과 개나리가 피어 있는 ‘책 읽기 좋은 날’이었으니까.
대통령 탄핵정국과 그로 말미암아 이어진 대통령 선거란, 소설보다 더 재미있고 기막힌 현실이 계속 펼쳐지고 있는데 책을 읽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잊고 있었다. 아무리 세상이 어수선하고 팍팍해도 책을 외면하면 정신이 허기지고, 문화가 멈추면 가슴이 메마른다는 사실을. 독서와 문화야말로 어지럽고 힘든 나날에 삶의 좌표를 알려주고, 가장 큰 위안과 즐거움이 된다는 사실을.
연초 국내 손꼽히는 출판 도매상인 송인서적이 부도를 맞았다. 출판계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특히 1인 출판사가 직격탄을 맞았다. 그들을 지원하고, 갈수록 떨어지는 국민 독서량을 조금이나마 높이기 위한 ‘일석이조’로 지난 2월 ‘문화가 있는 날’에 처음 선보인 ‘도깨비책방’은 그달의 공연·전시·영화 유료 관람권을 가져오면 책으로 교환해주는 행사였다. 송인서적 부도로 피해를 입은 461개 영세 출판사의 도서 468종을 선정했다.

▶ 4월 26일 오후 서울 신도림역 내 신도림예술공간 고리에서 열린 '문화가 있는 날' 도깨비책방을 찾은 시민들이 책을 고르고 있다. ⓒ연합
긴가민가했다. 책 한 권을 공짜로 준다고 얼마나 호응이 있을지. 워낙 책 읽는 사람도 없는 데다, 더구나 추운 겨울에. 아이들 동화책이나 받으러 오는 정도겠지. 결과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공이었다. 서울을 비롯해 부산, 광주 등 전국 6개 지역의 공연장과 극장 7곳에서 운영된 도깨비책방에 시민의 발길이 이어졌다. 나흘간 3만 6000여 명이 다녀갔다. 단순하게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도깨비책방이 독서 인구를 그만큼 늘린 셈이다. 게다가 어려운 출판계를 돕는 일이기도 했다.
내친 김에 4월 문화가 있는 날에 다시 한 번 도깨비책방이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방망이를 하나 더 준비했다. 공연·전시·영화 유료 관람권에 지역서점 도서 구입 영수증까지도 책으로 교환해줬다. 도깨비방망이를 두드리면 나오는 선물도 송인서적 부도 피해 출판사의 도서 455종에 최근 5년 이내 국내에서 창작 또는 집필된 작품을 담은 도서 99종이 추가됐다.
사흘 동안(26~29일) 서울의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신도림예술공간 고리, 강동아트센터와 수원의 경기도문화의전당, 울산 중구 젊음의 거리에 있는 메가박스 울산점, 청주 철당간, 목포 메가박스(영산로), 제주 중앙로 영화문화예술센터 등 8곳과 온라인(서점온)에 2월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려 준비한 책 4만 2000권이 금세 다 나갈 정도였다. 그 책을 받은 사람들 역시 5월의 한 부분을 독서로 채울 것이다.
이번 도깨비책방은 책의 종류와 지급 기준은 물론이고 그 모습도 2월과는 달랐다. 단순히 책 한 권만 선물한 것이 아니라, ‘세계 책의 날’을 기념한 ‘특별한 도깨비책방’으로 꾸며 책과 독서, 종이와 활자의 매력과 소중함까지 일깨워주는 ‘문화 공간’이 됐다. 서울 신도림예술공간 고리에서는 새로 추가된 도서 99종을 활용해 덕성여대 동양화과 학생들이 제작한 그림을 전시했다. 읽기뿐만이 아니라 종이의 촉감, 활자와 여백의 미를 통해 독서의 즐거움을 강조한 작품들로, 장소를 옮겨 국립중앙도서관과 국립세종도서관에서 계속 만나볼 수 있다.
직지의 고장 청주 철당간에는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인천 배다리 헌책방 거리의 ‘한미서점’으로 꾸민 포토 존이 만들어졌고, 청주 고인쇄박물관이 주관하는 인쇄문화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됐다.
4월 봄날에 어찌 책 이야기만 있으랴. 꽃과 음악과 영화와 전시가 사람과 함께 어우러지는 ‘문화가 있는 날’, 전국 주요 문화시설에서 2325개의 행사가 열렸다. 서울 탐앤탐스 블랙 청계광장점에서는 보컬그룹 스윗소로우와 싱어송라이터 소각소각이 ‘카페버스킹 탐스테이지’의 열네 번째 공연을 펼쳤다. 인천 숭의평화시장에서는 입주 상인과 예술가들, 주민이 직접 꾸민 꽃 조명탑 만들기, 시장 콘서트 등 ‘꽃놀이 대모험’을 벌였다.
안산의 주요 지하철역을 도는 ‘예술열차 안산선’은 ‘도시정원’을 주제로 봄 향기 가득한 휴식 공간 속에서 음악을 선사했다. 광주의 유일한 단관극장인 광주극장은 ‘수요일엔(N) 영화(榮華)롭게 만원(滿員)극장’으로 7080 추억의 영화관 시절로 돌아갔다. 제주도 서귀포시 치유의 숲에서는 ‘숲 속 힐링 콘서트 쓰담쓰담’이, 충남 예산군 충남도청 문예회관에서는 ‘2017 봄맞이 콘서트, 장미여관 & 백제가야금연주단’ 공연이 무르익은 봄을 만끽했다.
경기도 평택에서는 전통 굿을 접목한 창작 타악 공연 ‘힐링 퍼커션 바람의 숲’이 직장인들을 찾아갔다. 한국 영화 ‘특별시민’과 ‘임금님의 사건수첩’도 이날에 맞춰 전국적으로 개봉하면서 할인으로 관객을 맞았다. 이렇게 대한민국 4월의 하루가 책과 문화와 꽃과 사람이 있는 날이 됐다. 어쩌면 사람들은 5월에도, 6월에도 이런 특별한 하루를 기다릴지 모른다.
굳이 이렇게 날을 잡아서 요란스럽게 치르는 문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문화란 늘 일상과 함께하고 삶 속에 녹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진정한 문화 향유는 그래야 한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도 습관이다. 그때까지는 발길을 부추기는 이벤트가 자주 필요할 것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삶이 힘겨울 때 문화가 주는 살뜰한 위로는 얼마나 고마운가.
이대현 |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