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입니다. 경운궁은 원래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살던 개인 집으로 임진왜란 때는 그 후손이 살았지요. 전쟁으로 궁궐이 모두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됐습니다. 한때는 이곳을 서궁(西宮)이라 불렀습니다.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가 대비의 호를 빼앗기고 이곳에 갇혀 있을 때 사용하던 이름입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와 경운궁으로 환궁했습니다. 이후 고종은 환구단(?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시설인데 이 제천 의례는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의식이지요. 고종은 천자라 불리던 중국의 황제, 천황이라 불리던 일본의 황제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는 자주국 황제가 됐음을 경운궁에서 당당히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1907년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습니다. 그리고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이때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꿨습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입니다.
지금 덕수궁의 정문은 대한문(大漢門)입니다. 그런데 대한문은 덕수궁의 동문으로, 원래의 정문은 남쪽으로 난 인화문(仁化門)입니다.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로 모든 궁궐의 정문 이름에 ‘될 화(化)’ 자를 넣었는데 덕수궁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그런데 앞쪽으로 새로 길이 생기고 환구단이 동쪽에 세워지면서 대한문이 덕수궁의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덕수궁의 정전은 중화전(中和殿)입니다. 이 건물은 고종이 황제에 즉위한 후에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중화전 내부 천장, 월대 위의 향로 다리, 답도 등 곳곳에 황제의 상징인 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또 월대 모서리에 놓인 드므에도 ‘萬歲(만세)’라는 글자가 돋을새김돼 있습니다. ‘만세’는 원래 황제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이전 조선의 왕들은 ‘천세(千歲)’라는 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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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명당. 고종은 어린 외동딸 덕혜옹주를 위해 이곳에 유치원을 만들었다. ⓒ윤상구
중화전 뒤쪽에 있는 석어당(昔御堂)은 몽진에서 돌아온 선조가 머물던 건물입니다. 창덕궁과 종묘의 중건 공사는 조정이 환도한 지 15년이 지난 후에야 시작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선조는 창덕궁이 다 지어지는 것도 보지 못한 채 끝내 석어당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석어당 가까이에는 준명당(浚明堂)이 있습니다. 고종은 여섯 살 난 외동딸 덕혜옹주를 위해 이곳에 유치원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가끔 준명당에 들러 덕혜옹주의 친구인 유치원생들을 만나고 붓과 먹을 선물로 내려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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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벽돌로 된 2층 양옥 중명전은 일본이 침략 야욕을 확실하게 드러낸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다. 황궁우는 지금은 사라진 환구단의 부속 시설이었다. 3층 팔각정 형태이며 하늘신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석조전은 1900년부터 10년 동안 지은 건물이다. 광복 후 미소공동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윤상구
덕수궁에는 대한제국 때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 세 채 남아 있습니다. 석조전(石造殿)과 중명전(重明殿), 정관헌(靜觀軒)입니다. 석조전은 1900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은 건물로 광복 후 미소공동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중명전은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5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거리에 있습니다. 덕수궁의 원형이 많이 파괴돼 일부 건물은 이렇게 궁궐의 담 밖에 위치하게 된 것입니다. 벽돌로 된 2층 양옥 중명전은 일본이 침략 야욕을 확실하게 드러낸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입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중명전을 비롯해 경운궁 안팎에 무장한 군인을 배치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고종은 협약의 조인을 거부했습니다. 끝내 고종을 설득하지 못한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데리고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또 중명전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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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석고는 1902년 고종의 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만든 것이다. 중화전 뒤쪽 석어당은 선조가 머물던 공간이다. 선조는 창덕궁의 완공을 다 보지 못한 채 이곳에서 숨을 거뒀다. 고종 황제가 외교 사절 접대 때 커피를 마셨다는 정관헌. ⓒ윤상구
덕수궁 안쪽에 있는 서양식 건물 정관헌은 고종 황제가 커피를 마시며 외교 사절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활용됐습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있을 때 처음 커피를 맛봤는데 환궁 후에도 커피를 계속 즐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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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홍전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올 때 건립한 임금의 편전이다.ⓒ윤상구
정관헌 앞쪽의 덕홍전과 함녕전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올 때 건립한 임금의 편전과 침전입니다. 1897년 함녕전 대청마루에 정부 각 부처를 연결하는 전화가 설치됐습니다. 고종은 이 전화로 각부 대신에게 지시를 내렸는데 백범 김구 선생의 사형 집행을 막은 것도 이 전화였다고 합니다.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영광과 망국의 한이 깃든 궁궐입니다. 제국 궁궐의 모습을 완성해주는 시설은 환구단입니다. 그런데 1912년 일본은 환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호텔을 지었습니다. 지금은 지름이 100미터나 됐던 환구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그 부속 시설인 3층 팔각정 황궁우와 세 개의 석고(石鼓, 돌 북), 석조 대문만이 남아 있습니다. 황궁우는 하늘신의 위패를 모신 건물입니다. 팔각정의 통층으로 뚫린 천장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일곱 개의 발톱을 가진 황룡[七爪龍]이 새겨져 있습니다. 석고는 1902년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만들었는데, 세 개의 석고는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황인희 | 역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