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죽순이 솟는 계절이다. 봄비가 대지를 적시면 죽순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맹종죽, 분죽을 시작해 6월 중순까지 다양한 종류의 죽순이 솟아난다. 성장 속도가 워낙 빨라서 ‘우후죽순’이라는 사자성어를 만들어냈다. 대나무 고장의 대명사로 통하는 전남 담양은 사방팔방이 대나무밭이다. 대숲에 바람이 불면 곧은 긴 몸을 흔들어대면서 이파리들이 서로 가벼운 입맞춤으로 ‘서걱서걱’ 싱그러운 자연의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곳엔 지금 죽순이 지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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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녹원 산책로
문화체육관광부의 2017년 문화관광 최우수 축제로 지정된 제19회 대나무 축제(5월 2~7일)가 막바지를 달리는 날, 담양으로 발길을 내딛는다. 축제는 대성황임을 보여주고 있다. 죽녹원은 말할 것도 없고 담양천 방죽을 따라 이어지는 관방제림, 담양천변을 따라 마차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가족 여행객이 무수하다. 마침 장날(2일, 7일)까지 겹쳐 볼거리가 더 풍성하다. 어디 그뿐인가? 메타세쿼이아 길, 메타 프로방스도 인산인해다. 연간 500만 명이 담양군을 찾는다는 통계를 보면 여행은 이제 일상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오랜만에 죽녹원(2003년 5월에 개원)을 찾는다. 빽빽하게 들어찬 대숲은 한낮에도 어둠침침하다. 대숲 속에는 녹차(죽로차) 새순이 피어나고 가장 큰 대나무 종류인 맹종죽 죽순이 불쑥불쑥 솟아났다. 산책로도 무수한 관광객의 발걸음으로 분주하다.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시집왔다는 다문화 가족과는 여러 번 맞닥뜨린다. 대나무 벤치, 대나무 정자, 대나무 쉼터, 대나무 해먹 등 온통 대나무 일색이다. 특히 나이별 뱃살을 체크(?)하는 곳에서는 관광객들의 웃음이 터져 나온다.
대나무를 좋아하는 판다 곰 모형까지 등장했다. 판다 곰은 폭포 위에서도 놀고 풍물놀이도 한다. 면앙정이라는 이름의 전망대도 생겼다. 후문 쪽으로 가면 송강정, 면앙정의 정자와 소리 전수관인 우송당, 죽로차 제다실, 한옥체험실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 관방제림 걷기도 묘미
죽녹원을 벗어나 담양천변을 바라보고 있는 방죽에 길게 이어진 국수 거리에서 찐 달걀과 국수 한 그릇을 먹는다. 국수집의 달걀색이 검은 데는 이유가 있다. 멸치 등을 넣어 만든 육수에 삶은 달걀이라 맛이 훨씬 좋다. 국수 거리를 따라 장날의 난전이 길게 펼쳐진다. ‘대바구니 장’으로 시작된 담양장이다. 세월이 흘러 대나무를 이용한 죽세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지방색이 많이 남아 있는, 재미있는 재래장이다.
국수 거리 반대편은 관방제림(官防堤林, 천연기념물 제366호) 길이다. 조선 인조 26년(1648), 부사 성이성이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축조하고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그 기원이다. 긴 세월에 나무들은 굵어졌다. 봄철 벚꽃이 필 때나 가을 단풍이 특히 아름답지만 짙은 녹색의 이 계절에도 손색없다. 2004년 산림청이 주최한 ‘제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방죽 밑으로는 담양천 생태 하천이 길게 이어진다. 천변을 따라 열 지어 마차를 타고 오가는 가족 놀이객들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관방제림을 빠져나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통하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과 연계할 수 있다. 차량은 일절 통행할 수 없으니 오롯이 관광객의 몫이 됐다. 그 주변으로 2013년에 메타 프로방스 단지가 조성됐다. 지중해풍 건물이 밀집된 이 단지에는 식당, 카페, 펜션, 패션숍 등이 있다. 왜 이곳에 프랑스 남부를 옮겨왔는지는 따져 묻지 않겠다. 관광객들의 표정이 몹시 행복해 보이니 말이다.
좀 더 한적한 여정을 느끼고 싶어 봉산면으로 이동한다. 전남 민간정원 2호로 지정됐다는 죽화경을 찾아가는 길이다. 가는 길목에서 송순(1493~1583)이 건립한 면앙정(전라남도기념물 제6호)에 차를 멈춘다. 중종 28년(1533), 송순은 이 높은 언덕 위에 바람과 비를 겨우 가릴 정도인 초가 정자를 지었다. 송순은 “내려다보면 땅이, 우러러보면 하늘이, 그 가운데 정자가 있으니 풍월산천 속에서 한 백 년 살고자 한다”고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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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민간정원 2호 죽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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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죽화경의 커피 마시는 공간, 죽녹원의 대나무 벤치
‘초정’은 사라진 지 오래다. 기와가 얹힌 정자의 툇마루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다. 울창한 나무숲에 에워싸인 이 작은 정자에서 보낸 ‘짬’은 그 어느 곳에서 지낸 시간보다 행복하다. 면앙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죽화경이 있다. 고흥 쑥섬(전남 민간정원 1호)에 이어 두 번째 민간정원이다. 평생 조경 일을 했고 순천국제정원박람회장에 한국 정원을 만들었다는 50대 정원지기는 10여 년 동안 손수 정원을 가꿨고, 2011년 5월부터 일반인에게 개장해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약 4000평(1만 2611㎡)의 터전에 100여 품종의 장미와 데이지 등을 비롯한 341종의 식물이 어우러진 정원이다. 자연 친화적인 한국 정원에 외국인들이 극찬을 한단다. 햇살 좋은 정원의 파라솔 밑 의자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사색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이 정원에서는 6월 10일까지 제8회 데이지·장미축제를 개최한다.
면앙정에서 쉬고 죽화경에서 사색하고
담양에서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산성산(603m)의 금성산성(사적 제353호)과 연동사(煙洞寺)다. 그러나 전날 밤부터 쏟아진 폭우가 그칠 줄 모른다. 꼭두새벽, 빗길을 가르며 산성산 쪽으로 달려가면서 산행은 포기한다. 연동사만이라도 찾을 생각이다. 대숲의 오솔길을 따라 매달린 연등은 연동사까지 길 안내를 한다. 대숲 죽순 껍질을 뱀 허물 벗듯이 떨궈내고 마디마다 빗물이 스친다.
연동사에 꼭 다시 가고 싶은 이유 중 하나는 노천법당에 있는 고려 석불 지장보살입상과 삼층석탑(전남문화재자료 제200호)이다. 관음상을 지나자마자 길목 우측에 ‘동학농민군혁명 전적지’ 표식돌이 있다. 연동사가 생긴 것은 2000년경. 결코 오래되지 않은 사찰인데 왜 이곳에 전적지 표식돌이 있을까? 연동사의 창건 연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애써 기록을 찾으면 〈신증동국여지승람〉 및 〈추성지〉에 고려 문종 때 이영간(1047∼1082)이 연동사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동사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졌다. 연동사는 금성산성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다.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 때 금성산성에서는 의병과 왜병의 지옥 같은 격전이 벌어졌다. 전투가 끝나고 왜군이 물러난 후 의병의 시신을 계곡에 모았는데 2000여 구에 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이천골(二千骨)이다. 연동사는 이천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전투에서 죽은 의병 가족들이 절을 찾아 향불을 피웠는데,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안개처럼 사라지지 않아 절 이름이 연동사가 됐다. 또 구한말에는 동학군이 거병했고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이 자리를 잡았다.
산성산의 거대한 바윗돌 아래에 노천법당이 있다. 바윗돌의 무게에 짓눌렸을까. 등허리가 구부정해 보이는 석불을 향해 ‘잘 있었느냐’고 눈인사를 한다. 석불 옆에 있는 3층 고려 석탑은 흩어져 있던 부재를 모아 1996년에 복원한 것이다. 노천법당 앞, 금성산 자락에는 비안개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억수로 내리는 빗줄기에도 촛불 한 개는 꺼지지 않았다. 그 질긴 힘에 왠지 희망을 느낀다.
노천법당 위에 있는 석굴까지 보고 천천히 요사채로 다가선다. 폭우를 가르며 때 이르게 찾아온 여행객은 사찰을 떠나기 아쉬워하며 나무 벤치에 걸터앉는다. 요사채 안에서는 누군가의 아침잠을 깨우는 스님의 목소리와 고소한 된장국 냄새가 소올솔 풍겨온다. 아침 공양 시간을 호기심 가득 안고 귀를 쫑긋거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긴 세월 동안 하나하나씩 중창을 했을 주지에 대한 궁금증이다. 달마 스님의 ‘무주상 보시’라는 글과 그림이 그려진 대웅전 벽화, 골짜기 따라 자연 친화적으로 만들어진 선방과 해우소 등,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창작 그림과 건축물을 만들어낸 이가 아니던가!
요사 기둥 흙더미에 배를 깔고 추운지 서로 털을 붙인 채 잠자는 진도견 새끼 세 마리가 눈에 띈다. 찰칵대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귀찮은지 한 놈이 부스스 눈을 뜬다. 그때서야 스님이 밖으로 나온다. 잠시의 눈인사면 충분하다. 그때 한 처사가 방 안으로 얼른 들어갔다 나오더니 바나나 하나를 건넨다. 빗길을 가르고 찾아온 중년 여인이 아침을 걸렀을 것이라는 짐작의 행동이다. 이미 카메라에 습기가 찼지만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한 일인가. 우후죽순으로 솟아오르는 죽순 향기를 맡으며 ‘아름다운 절집’의 새벽 우중 산책을 한 오늘을 어찌 잊을 것인가. 요사채 기둥 위에 쓰인 글귀만 뇌리에 뱅글댄다.
오시는 이 누구인고! 백 년 전에 그놈은 오늘 그놈이로다.
여행 정보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 백양사IC > 백양사 > 담양읍 혹은 무주 > 통영대전고속도로 > 함양분기점에서 88고속도로를 타고 담양IC를 이용해도 된다. 읍내에서는 죽녹원 > 관방제림 > 메타세쿼이아 순으로 산책을 즐기면 된다. 그 외 연동사는 담양읍내에서 순창 간 24번 국도를 따라 금성면을 지나 산성 길로 좌회전, 담양온천을 앞두고 우회전해 야영장을 지나면 나온다. 죽화경은 담양, 광주 간 고속도로 쪽으로 가다 봉산면에서 팻말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추천 별미집
담양은 떡갈비가 별미다. 신식당(061-382-9901), 덕인갈비(061-381-2194)가 오래됐다. 돼지숯불구이도 유명하다. 옛날제일식당(061-381-2404), 쌍교숯불갈비(061-382-0012), 금성참숯불갈비(061-381-6784)가 괜찮다. 죽순 요리는 대통밥 정식집을 찾으면 된다. 또 담양 장날(2일, 7일)에는 전통 피순대를 만든다. 담양천 방죽에는 국수 거리가 조성돼 있다. 또 메타 프로방스에 가도 다양한 음식과 쇼핑을 즐길 수 있다.
숙박 정보
죽녹원에는 3만 평 규모의 죽향 문화체험마을이 있다. 세 동의 한옥은 연중 숙박이 가능하다. 또 담양온천(061-380-5000, www.damyangresort.com)에서는 온천욕과 숙박이 가능하다. 그 외에도 2013년에 조성된 메타 프로방스(http://www.metaprovence.com/)에도 펜션 단지가 있다.
기타 볼거리
담양엔 볼거리가 아주 많다. 소쇄원 등 정자 문화권 여행도 좋지만 요즘 같은 때는 담양호반을 따라 가마골 생태공원(담양군 용면 용소길 261, 061-380-2794)을 찾으면 시원한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문의
죽녹원 061-380-2680, 죽화경 010-8665-7884, 연동사 061-381-0189, 담양군 관광레저과 061-380-3153
이신화 |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