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소설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영국의 맨부커상을 수상했을 때만 해도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를 따내면서 그만큼 우리 문학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과 평가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난해 노벨 문학상이 미국 가수 밥 딜런에게 돌아갔으니, 그런 ‘이변 아닌 이변’이 우리에게 없으란 법도 없으니까.
맨부커상을 받았다고 곧바로 노벨 문학상까지 욕심내는 것이 성마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 활발한 해외 번역과 출간, 지구촌 곳곳에 번진 한류 열풍, 이미 제3세계 많은 작가의 수상 전례에 비춰보면 무리한 기대도 아니다. 이런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올해도 노벨 문학상은 우리를 외면했다. 후보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를 선택했다. 영국 최대 배팅 사이트 래드브룩스가 이번에도 시인 고은을 수상 가능성 높은 네 번째 인물로 지목했지만 허사였다.

▶ 서울 중구 광화문의 한 대형 서점 특별 코너에서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이 판매되고 있다. ⓒ뉴시스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은 두 가지 점에서 우리의 시각과 문학을 되돌아보게 한다. 하나는 그가 일본인이지만 영국 국적의 작가란 사실이다. 이미 두 번의 자국 작가 수상(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 1994년 오에 겐자부로)을 기록한 일본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이 범일본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데뷔작 <창백한 언덕 풍경>(1982년)을 제외하면 일본의 시간, 공간, 정서와는 거리가 먼 문학 세계를 구축하고 있음에도 그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일본 문학에 대한 평가와 관심을 높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중국도 2000년 프랑스 국적의 중국인 가오싱젠의 수상 후 12년 만에 첫 노벨 문학상 수상자(모옌)가 나왔다.
또 하나는 노벨 문학상이 지향하는 가치다. 지난해 가수 밥 딜런, 2015년 논픽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수상을 놓고 설왕설래했다. 영역의 확장, 문학에 대한 고정관념 탈피란 긍정적 평가가 있었는가 하면, 문학의 본래의 가치와 정통성 훼손, 정치적이란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문학이란 그 본질만큼이나 시대와 인물, 영역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만 해도 그렇다. 그 역시 문학의 순수와 대중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든 작가다. “13세 이후, 밥 딜런은 나의 영웅”이라고 할 정도로 대중음악을 좋아해 소설 <녹턴>에 그것을 담기도 했다, 2009년 그래미상 후보에 오른 재즈 가수 스테이시 켄트의 앨범 ‘출근 전차에서 아침을’ 작사에 참여했고,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 영화 대본까지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전통 문학’으로의 회귀로 해석하는 이유는, 그가 현대 영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고 그의 작품이 지닌 문학적 깊이와 독창성, 확장성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영화로 더 잘 알려진 대표작 <남아 있는 나날>이나 <우리가 고아였을 때>,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에서 보듯 그의 소설은 기억과 시간과 내면을 통해 ‘세상 속 인간’의 모습을 날카롭고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이시구로는 변하는 시대와 환경에 맞춰 자기 문학 세계의 폭을 넓히고 있다. 역시 영화화된 SF 소설 <나를 보내지 마>에서 그는 장기 이식을 위해 복제된 클론의 사랑과 운명을 통해 미래의 슬픈 인간 세계와 인간 본질을 탐구하고 상상했다. 스웨덴 한림원이 “이시구로는 놀랍도록 정서적인 힘을 가진 소설을 통해 세계와 연결된 우리의 불가해한 감각의 심연을 드러낸다”고 평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현대 작가, 섬세한 정서, 세계와의 연결, 감각의 심연, 미래, 변화. 어쩔 수 없이 일본인 특유의 정서와 기질이 스며 있는 그의 이런 특색이야말로 어쩌면 문학의 본질이자 전통이며, 노벨 문학상이 지향하는 가치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얼마나 대중적이냐 아니냐, 세계적 지명도가 있느냐 아니냐는 별개다.
한국 문학의 노벨 문학상 수상 조건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케이팝이나 드라마, 영화처럼 척박한 독서 환경을 바꿔 우리 스스로 문학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높여야 한다’, ‘번역의 힘과 해외 출판을 키워야 한다’에서부터 ‘노벨 문학상도 정치적이어서 정치력을 높여야 한다’까지. 맞는 얘기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상을 받으면 국내외 작품 할 것 없이 갑자기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얄팍한 독서 풍토로는 문학을 살찌울 수 없다. 창작을 뛰어넘는 번역도 필수 조건이다. 가끔은 노벨 문학상조차 정치적이어서 실망을 준다.
그러나 국내 독자가 적어, 번역이 충분치 않아 고은은 15년 동안 후보에만 오르는 것일까? 우리보다 문학 풍토가 열악한 헝가리의 임레 케르테스나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어떻게 수상자가 됐을까? 나이지리아의 윌레 소잉카는 이미 30년 전에, 희곡으로 아프리카 작가로는 최초 수상자가 됐다.
노벨 문학상이 때론 ‘파격’과 ‘이변’을 연출하더라도 결코 변하지 않고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문학성과 그 문학성을 이어가는 작가의 현재성이다. 수상자가 되고 나면 작품이 과대평가되기도 하지만 그의 치열한 작가 정신과 문학으로서의 독창성, 보편성, 시간성, 실험성은 부인하기 어렵다.
때문에 과거에 머물러 전성기를 뛰어넘는 ‘현재’의 역작이 없는 원로 작가, 자신만의 독창적 문학 세계를 쌓아가기보다는 역사나 자기 고백에 매달리는 작가로는 노벨 문학상을 기대할 수 없다. 언제까지 고은 한 사람만 하염없이 쳐다볼 것인가. 노벨 문학상은 가즈오 이시구로처럼 문학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오랜 시간, 끝없이 자신의 문학 세계를 일구고 쌓는 작가에게 예고 없이 찾아간다.
아직 멀지만 우리에게도 그 길을 가고 있는 작가들이 있다. 꼭 국내 작가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의 가오싱젠처럼 영어로 소설을 쓰는 재미 작가 이창래도 있다. 부커상이 그랬듯이 그들이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느 날 노벨 문학상이 그들을 찾을 것이다. 노벨 문학상은 문학의 최종 목표도, 최고의 봉우리도 아니다. 그러나 그 상이 국가와 민족 문학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고 지평을 넓혀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간절한 만큼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이대현│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