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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의 미학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의 한 장면.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공식 홈페이지
이보다 더 ‘풍성’할 수는 없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면서 방방곡곡이 축제로 들썩인다. 들판에서도, 산에서도, 강가에서도, 항구에서도, 작은 공원과 광장에서도, 고궁에서도, 대학 캠퍼스에서도, 작은 동네 골목에서도 연일 잔치판이 벌어지고 있다. 유난히 힘든 시간을 보낸 뒤에 찾아온 축제라 그 기대와 설렘 또한 클 것이다.
대문 밖만 나서면 사람과 자연, 전통과 특산, 예술과 역사, 춤과 노래와 음식이 어우러지는 향연을 만날 수 있다. 이미 그것을 즐겼다면 옆 동네로 건너가면 된다. 아주 작은 동네잔치까지 합하면 한 해에 1만 개 정도가 열리고 그 절반 가까이, 제법 크기와 모양새를 갖춘 1000여 개의 축제가 이 가을에 열린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 아니라 ‘축제의 계절’이다. 유례없이 긴 추석 연휴가 잔치 분위기를 더욱 북돋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출발의 환희를 알리는 봄 축제의 주인공이 싱그러운 초록과 화사한 꽃과 따스한 햇살이라면, 수확의 기쁨과 감사의 가을 축제의 주인공은 탐스런 열매와 울긋불긋한 단풍과 청량한 바람이다. 수확의 계절인 만큼 유난히 먹거리 잔치가 많고 저마다 지역 특산물을 자랑하고 문화 공연이 함께한다. 술(와인)이 국악과 어우러지기도 하고, 치즈가 한옥마을 대청마루에 놓이기도 하고, 북과 북(책)이 만나기도 한다.
놀이와 잔치를 마다할 사람은 없다. 축제가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나 마찬가지다. 요한 하위징아가 ‘호모 루덴스(유희의 인간)’라고 했듯이 축제는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 유희에서 전통이 나왔고 문화와 예술이 나왔다. 지역 전통의 발굴과 계승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익도 가져다주고 관광자원까지 되살린다면 그야말로 다다익선이다. 곁들여 지역 특산물을 홍보하고 지역의 이미지까지 높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콘텐츠가 어디 있으랴. 축제가 마냥 놀자판, 먹자판이 아닌 지역의 삶과 역사, 독창적 가치를 담아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축제의 속을 들여다보면 헛헛하다. 장소와 이름만 다를 뿐 비슷비슷한 프로그램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올 가을 경북 안동의 탈춤, 경북 예천의 활, 경기 파주의 북(책)처럼 물론 이름만 들어도 축제의 성격, 지역의 역사와 전통, 문화와 자연, 특산물을 떠올리게 하고, 무엇을 보고 즐길지 알 수 있는 독창적인 축제들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축제가 붕어빵 같은 모습, 업적 과시나 홍보 전시장 같은 느낌이다. 우리나라 관광지 어디를 가도 똑같은 기념상품을 팔듯, 곳곳에 자리 잡은 ‘메이드 인 차이나’, 토속 아닌 토속 음식이 즐비한 야외 음식점, 대중가수들의 공연과 경품권으로 선물 하나씩 얻어가지고 돌아오는 축제도 한둘이 아니다. 이는 축제의 본질인 ‘함께 만들고 즐기기’에서 함께 만들기를 소홀히 한 탓이다.
예로부터 축제, 특히 향토 축제는 그곳 문화와 역사, 사람과 자연이 엮어내는 제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가을에 수확한 풍성한 특산물로 자연과 조상에게 감사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고, 풍요로운 내일을 다양한 놀이와 의식으로 기원했다. 때문에 축제에는 지역 특성이 배어 있어야 하고, 축제의 성격을 지역 주민들이 함께 만들어가고 그 속에 어우러져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의 것이 되고, 지역 특유의 문화나 정서가 스며든다. 지역 문화와 역사, 사람과 삶이 연결되지 않은 축제, 지역 주민이 참여하지 않고 만들지 않은 잔치는 흥이 없을뿐더러 그저 공허할 뿐이다.
일본의 마쓰리(축제)를 보라. 크든 작든 그 지역 주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해 만든다. 함께 모여 의견을 나누고, 저마다 작은 역할이라도 하나씩 맡아 필요한 것은 손수 준비한다. 비록 소박하고 초라하더라도 거기에는 공동체 정신과 정성이 스며 있기에 축제가 생명력을 지닌다. 우리 축제도 그랬다.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에서 보듯 백성들이 손수 정성껏 준비한 토산물을 신(하늘)에게 바치고, 내남없이 신명나게 어울려 밤새도록 춤과 노래와 음식으로 공동체의 동질성과 결속을 다졌다.
오늘의 지역 축제도 그래야 한다. 옛것을 그대로 재현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모습과 색깔은 달리하더라도 역사적 전통과 가치, 뜻을 창조적으로 이어나가야 한다. 참여를 통해 함께 만들고 즐기고 느끼고 간직해나갈 때 ‘축(祝)’도, ‘제(祭)’도 진정한 참여와 놀이의 즐거움이 되고 소통이 되며 살아 있는 ‘명품’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자체의 축제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축제를 단순히 노는 것, 지역 주민에 대한 서비스로 생각하다 보니 외형적인 화려함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축제가 지역 고유의 민속성과 전통, 생활풍속을 살리는 문화, 지역 주민이 즐기는 유희가 되기 위해서는 창조적 아이디어와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한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편의성을 위해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프로그램을 기획사에 맡길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이 주체가 되어 함께 만들고 즐기는 축제여야 한다.
지역 축제가 홍수처럼 불어난 것은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고부터였다. 그러나 대부분 처음에는 지역 문화와 전통을 살리고 지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지자체장의 다음 선거용 자기 홍보와 생색내기 성격이 짙었다. 그래서 시장, 군수가 바뀌면 그 축제도 바뀌거나 작아지거나 없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역 주민이나 정서, 지역적 특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들이 축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도 많았다.
그것은 적게는 수십억 원에서 많게는 수백억 원의 혈세만 낭비하는 결과를 낳았다. 무작정 잔치판만 벌인다고, 추첨으로 경품을 나눠준다고, 특산물 몇 개 더 팔아준다고 지역 주민들이 기뻐하고 자신을 칭송할 것이란 착각은 버려야 한다. 누구의 말처럼 축제도 주민 참여, 독창적 스토리와 놀이, 기술과 소통의 2.0으로 진화해야만 주민 만족, 경제 효과, 문화 발전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 시간에도 어디에선가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그곳에 가면 무엇을 만나고, 어떤 것을 즐기고,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가슴 설레며 가보고 싶은 축제, 소박하지만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이 흠뻑 젖어 있는 축제, 사람과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축제, 그래서 즐기고 나면 마음까지 풍성해진 느낌을 받는 우리의 가을 축제를 만나고 싶다.
이대현│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