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퉁불퉁한 비포장과 시멘트 포장길이 4km 정도.
하늘 향해 쑥쑥 뻗어나간 소나무 숲길을 지나고 몇 개의 개울을 잇는 다리를 건너고 시원한 계곡 길을 따라 지리할 정도로 한참을 가야만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통마름골. 얼레지와 한계령 풀 등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나고 산나물이 샘솟듯 피어오르는 오지 마을. 이제는 자꾸만 외지인들이 찾아와 둥지를 틀고 올해 안으로 4차선 길까지 날 예정이지만 여전히 폐부까지 신선한 공기를 흡입할 수 있는 곳. 강원도 첩첩산중 마을이 사라지기 전에 봇짐을 챙겨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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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홍천 살둔마을의 봄 (왼쪽 아래)통마름골에 들어서면 봄나물이 지천이다. 곰취는 이곳 대표 먹거리다. (오른쪽 아래) 진달래가 화려하지만 바람꽃의 자태도 멋스럽다.
강원도의 봄은 어떨까? 일부러 국도를 따라 멀고 먼 길을 휘돌고 돌아 홍천군 내면 명개리로 향한다. 홍천군을 지나 인제군 상남에서 내린천 줄기를 따라 미산마을을 스친다. 고산의 나무들은 아직 헐벗은 채지만 골 깊은 계곡을 따라 진달래와 산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새싹을 틔우기에는 많은 봄 햇살이 스며들어야 할 것이다. 맑은 공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미산마을에서 살둔마을까지 천변 따라 이어지는 446번 지방도는 추억이 깃든 곳이다. 미산마을까지 버스 종점이던 때가 20년 전. 고산이 앞을 가리고 있어 더 이상 갈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살둔마을을 벗어나 56번 국도를 타고 구룡령 방면으로 간다. 내비게이션은 명개리까지 길 안내를 잘해준다. 오대산국립공원 북대사까지 이어지는 길은 ‘통행 불가’라는 팻말로 길을 가로막는다. 주변 농가의 텃밭에는 깊은 산속에서나 자랄 수 있는 명이나물(산마늘), 곰취가 지천으로 재배되고 있다. 울릉도의 특산물로만 알려졌던 명이나물이 고소득 작물이 되면서 재배 농가가 많아진 것이다.
이제 시작된 봄, 명이나물과 곰취 지천
명개리 통마름골로 들어서면서 느슨해진 마음이 탱탱한 탄성을 되찾는다. 이곳을 찾은 지 4~5년 만인가? 아니면 그보다 훨씬 더 전일지도 모르겠다. 뭐가 변했을까? 예전에 만났던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살고 있을까? 통마름골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민박집의 커다란 간판을 따라 들어간다. 초입에 울창한 소나무 숲 주변에는 두 채의 민가가 있다. 이제는 강원도의 ‘소박한 옛집’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오지, 산골 사람들도 사는 데 불편한 옛집을 거부한 지 오래다. 마을까지 이어지는 임도는 이제 거의 다 시멘트 포장이 됐다. 간혹 비포장을 만나지만 어려울 부분은 없다.
변하지 않은 것은 자연이다. 우렁차게 쏟아져 내리는 계곡의 맑음과 물소리는 여전하다. 그늘진 곳에는 이 봄에도 녹지 않은 눈덩이가 남아 있다. 봄철에 물소리가 더욱 우렁찬 것은 겨우내 언 눈이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흐드러지게 진달래꽃이 피었고 가장 먼저 새순을 피워낸다는 ‘홑잎나물’이 지천이다. ‘화살촉’ 모양의 잎 때문에 이름 붙여진 화살나무. 화살나무 순은 암은 물론 간에 특효가 있다고 하니 여행객의 눈길을 자꾸만 끌어당긴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노란색, 보랏빛 현호색도 흐드러지게 피었고 바람꽃, 개별초 꽃도 이곳저곳에서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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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마름 약수터 다리. 통마름 약수는 톡 쏘는 탄산 맛이 느껴져 설탕만 넣으면 사이다 같다.
약수산에서 만난 신비한 철분 약수
임도 중간 즈음에 통마름 약수터 팻말이 있다. 그 앞에 차 한 대가 서 있다. 울산에서 왔다는 중년 남자는 ‘오늘 이곳에서 비박할 계획’이라면서 소주 한 병과 함께 조촐한 술상을 펼친다. 계곡을 건너는 통나무 다리엔 ‘화전민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도 우렁차게 계곡물이 흘러내린다. 열목어가 튀어 오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운이 좋을 때일 게다. 다리를 건너면 두 갈래로 길이 나뉘고 ‘천하 약수’라는 나무 팻말을 따라 0.7km만 가면 약수터에 이른다.
반대편 길로 오르면 새로 집 한 채가 들어서 있다. 약수터까지 가는 길은 계곡 옆으로 나서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가래나물, 팥고비, 풀고비, 당귀싹, 화살나물 등 나물들 새순이 뾰족하게 올라오고 애기괭이눈과 꽃잎에 점이 박혀 보기 쉽지 않다는 긴개별꽃도 눈에 띈다. 산나물과 야생화를 관찰하면서 10분 남짓 올랐을까? 자그마한 폭포를 앞두고 철분 빛으로 벌겋게 변한 약수터 두 군데가 있다. 자연은 참으로 신비하다. 계곡 옆에 어떻게 이런 철분 약수터가 생겼는지 생각할수록 오묘하다. 붉은 물 사이로 뽀르르 기포가 올라온다. 물위에 떨어진 낙엽을 걷어내고 손으로 물을 마신다. 강한 철분 맛보다 톡 쏘는 탄산 맛이 느껴져 설탕만 넣으면 사이다 같다. 이 약수를 통상 통마름 약수라고 부른다. 산 이름은 약수산이다. 약수산을 둘러싸고 남으로는 통마름 약수, 서쪽으로는 삼봉 약수, 북으로는 갈천 약수, 동으로는 불바라기 약수가 있다. 약수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고 해 붙인 듯하다.
두 배나 늘어난 민가 속에 남은 옛 강원 촌가
약수터를 벗어나 다시 임도를 따라 더 안쪽으로 들어간다. 마을에 이를 즈음, 새로 들어선 집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띈다. 또 집이 지어지는지 곳곳이 파헤쳐져 있다. 통마름 산장에 들러 미리 예약한 곤드레밥을 먹는다. 몇 년 만에 만난 산장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사는 혜택이 아닐까? 아주머니가 차려준 산마늘 생김치와 주변에서 뜯어서 무쳤다는 봄나물을 반찬 삼아 곤드레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지금은 20가구가 넘어. 다 외지인들이지. 오늘도 새로 집 짓는 사람들 단체로 점심상을 차렸지 뭐.”
“나물은 안 뜯나요?”라고 묻는 이유는 해마다 이맘때면 이 마을에서는 얼레지 나물을 채취하기 때문이다.
“이젠 가기 어려워. 산림청에서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는데, 그래도 더러 뜯어가기도 해. 그리고 올 10월경에는 4차선 도로가 나.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면 번잡해지겠지 뭐”라고 말한다. 이곳의 특색은 나물 뜯는 마을에다 아직까지 남은 첩첩 오지 마을이었는데, 머지않아 여느 강원도 촌락과 별다르지 않은 마을로 변해버릴 거라는 생각에 몹시 섭섭해진다.
산장을 나와서 바로 윗집으로 올라간다. 이 마을에서 가장 나물을 많이 채취하고 말리던 노인 부부가 사는 집이다. 원래는 이 집을 끝으로 민가가 없었는데 주변으로 네댓 채나 새로 생겨 잠시 긴가민가해야 했다. 바짝 붙어서 새 집이 들어서는 바람에 더 초라한 모습이 돼버렸다. 가만히 살펴보니 나물 삶던 아궁이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웃집이 생기면서 불편했는지 장작을 켜켜이 쌓아 담장이 돼 버렸다.
강원도 촌집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은 현재 이 집뿐이다. 불러도 인기척이 없어서 살며시 부엌문을 열어본다. 커다란 무쇠솥이 두 개, 고기도 구워 먹고 화로로도 쓰는 널찍한 양철통이 한편에 놓여 있다. 깊은 산속 물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수도꼭지는 잠그지 않은 채로 졸졸 물이 흘러내린다. 옛 모습 그대로다. 부엌에서는 불을 땐 듯한 열기가 느껴진다. 다행히 할아버지를 만난다. 할아버지는 이곳을 떠나지 않고 이 터전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춘천에서 가게를 하는 데다 얼레지 나물 채취가 어려워지자 서둘러 이 마을로 들어오지 않는단다. 그 집을 돌아 나오면서 배고파서 새순을 맛있게 따먹는 마른 다람쥐 한 마리를 만난다. 나무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사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허기를 채우는 다람쥐가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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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얼레지 나물과 한계령풀 군락지
응복산에 피어난 귀한 한계령풀
임도는 출입을 통제하는 쇠줄이 걸려 있어 더 이상 갈 수 없다. 40여 분 정도 걷는다. 나무들은 아직도 썰렁한 겨울 분위기를 내지만 산행 길에 간간이 고개 내민 야생화가 반갑다. 노랗게 피어난 ‘괭이눈’과 ‘꿩의바람꽃’, ‘댓잎현호색’ 노랗게 종 모양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백두대간 능선 아니면 볼 수 없는 ‘한계령풀’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한계령풀은 무지 희귀한 꽃으로, 지리산 모데미골에서 처음 발견된 모데미풀처럼 한계령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죽 길을 지나고 능선 참나무 군락지 밑으로 귀하디귀한 야생화가 눈에 띄더니만 능선을 넘어 고갯길에 이를 즈음에는 완전히 야생화 화원이 펼쳐진다. 일부러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화원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노란 꽃 사이로 얼레지의 보랏빛 꽃까지 합세해 더욱 빛이 난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야생화 화원이다. 5월 초순경까지 얼레지 꽃이 피고 질 것이다. 얼레지는 일명 ‘가제무릇’이라 불리기도 하며 고산지대 숲 속의 음지에서 자라는 백합과의 다년생 초본이다. 높이 25센티 정도 자라고 4월에서 6월에 자주색(흰색 변이도 있다) 꽃이 핀다. 잎이 얼룩덜룩해 얼레지라 이름 붙였다고 하며 꽃말은 ‘질투’ 또는 ‘바람난 여인’이라고 한다. 얼레지는 씨앗이 발아해 꽃을 피우기까지 7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통마름골을 벗어나면서 잠시 차를 멈추고 홑잎나물을 뜯으면서 생각해본다. 세월이 흐르면 상황이 변하는 것은 당연지사. 과거의 모습을 억지로 갖다 붙이려 하는 것은 필자의 욕망일게다. 어쩌면 4차선 도로가 생기고 나면 아예 발길을 끊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내 언제 이곳을 다시 오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가슴 깊숙이 자리하는 ‘추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통마름 약수 가려면 개울을 건너야 했기에 꼭 필요해서 샀던 목 긴 장화, 할머니가 건네준 얼레지 된장국 한 그릇, 마을 주민들과 함께 어울려 먹던 삼겹살 파티 등. 이미 과거 속에 새겨진 산 기록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태기 산정에서 만난 지는 해가 그리도 아름다운 것도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여행 정보
주소 강원 홍천군 내면 통마람길
찾아가는 방법 영동고속도로 > 속사IC > 운두령 고개 넘어 창촌 방면으로 난 56번 국도 이용 > 창촌 > 구룡령 가는 길에 우측 명개리로 들어가는 446번 지방도로 우회전. 다리 앞에서 왼편 비포장 길로 좌회전 > 응곡마을
맛집과 숙박 정보 응곡마을 통마람 산장(010-8795-1684)에서는 식사와 민박이 가능하다. 가는 길목, 이승복 기념관 주변에 운두령횟집(033-332-1943, 송어회, 용평면 운두령로 825), 장수촌(033-332-7419, 토종닭, 용평면 운두령로 286)이 괜찮다. 삼봉 자연휴양림(033-435-8535, 홍천군 내면 삼봉휴양길 276)이나 자연속으로(033-334-0770, www.naturalpension.com, 용평면 운두령로 109-49)이라는 펜션에서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이신화 |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