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은 사랑보다 더 깊고 넓은 사랑을 타인에게 줄 수 있을까. 오랫동안 이것은 내 삶의 뜨거운 화두였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이 결코 작지 않기에, 그만큼의 사랑을 과연 타인에게 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때로는 ‘나는 왜 이렇게 사랑받지 못할까’라는 좌절감이 들 때도 있지만, 좀 더 내 인생을 멀리 떨어져서 겸허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내가 준 사랑보다는 받은 사랑이 훨씬 큼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사랑은 연인끼리의 배타적인 감정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나눌 수 있는 따스한 친밀감 전부를 가리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때는 사랑인 줄 몰랐는데, 이제 돌이켜보니 그건 사랑이었구나!’ 하는 아련한 감정의 애틋함이 깊어진다.
주변을 돌아보면 ‘받은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모님이 일찍 헤어지신 뒤 어머니의 사랑도 아버지의 사랑도 마음껏 받지 못한 우리 제부는 자신의 두 아들은 물론 주변 사람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푼다. ‘남들 좀 그만 챙기고 자기 몸부터 좀 챙기지’ 하는 안타까움이 들 정도다. 우리 부모님도 그렇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보는 게 소원이셨다고 한다. 무뚝뚝하고 가부장적이며 가족 간의 수평적 대화는 불가능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안타까워하며 아버지는 우리에게 ‘언제든 하고 싶은 말을 하라’며 격려해주셨다. ‘엄마아빠에게 존댓말을 쓰지 말고 반말로 이야기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더 편하게 속 깊은 말을 털어놓게 하기 위한 격려였다. 요새 내가 꿈꾸는 더 넓고 깊은 사랑은 ‘가족과 친분을 뛰어넘은 사랑’이다. 고(故)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의 빈민가 어린이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 문장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이미 안면이 있는 존재에게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채로, 심지어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사랑보다 더 많이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그 중요한 동력 중 하나가 바로 간접경험이다. 간접체험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생래적인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보고 배우는 사랑,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받는 사랑, 실제로 주는 사랑의 한계를 뛰어넘는 또 하나의 사랑, 그것은 바로 타인의 삶을 통해 배우는 사랑이다. 내가 처한 현실의 체험과 편견을 벗어날 수 있는 힘, 내가 나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 그것은 ‘내 것이 아닌 삶’을 가상으로 체험해보는 간접경험의 힘 속에 오롯이 녹아 있다. 나는 때로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사랑의 끝까지 걸어가 보고 싶고, <레미제라블>의 다니엘 주교님처럼 절망에 빠진 장 발장에게 “내 은촛대도 가져가주오, 당신은 나의 친구니까”라고 말하고 싶다. 더 많은 책을 읽을수록 불특정다수의 인류에 대한 공감능력은 높아지고, 자신의 주어진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상상력도 풍요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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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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