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10~30년밖에 안 된, 그래서 아직은 ‘고전’이라고 부르기 민망하지만 이름만 들어도 명작이라고 할 만한 영화들이 줄줄이 다시 찾아왔다. ‘사랑과 영혼’,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델마와 루이스’, ‘러브레터’, ‘일 포스티노’, ‘샤인’, ‘빌리 엘리어트’. 그중에는 ‘클래식’처럼 한국 영화도 있다.
복고 열풍은 아니다. 추억의 실버 영화관도 아니다.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이벤트도 아니다. 문학이나 미술과 달리 영화는 다분히 일회성 대중문화 상품이기 때문에 쉽게 낡고 지속성이 약하다. 고전이라고 이름 붙인 영화들도 그대로 다시 찾아오기보다는 ‘리메이크’란 새 옷을 입고 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거 모습 그대로 다시 극장을 찾아왔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플랫폼)으로, 그것도 값싸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만큼 다시 상영할 가치가 있다는 얘기다. 인간의 보편적 가치들, 이를테면 순수한 사랑이나 인생의 의미를 섬세하고 깊이 있게 성찰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소통과 감동을 이끌어낸다. 20~30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영화가 엮어낸 이야기들은 우리의 삶 속에 있고, 그것의 감동과 공감은 여전히 절실하다. 그래서 그때는 미처 그것을 몰랐던 사람들, 아니면 그때의 느낌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속삭인다. “어때요, 지금 내가 필요하지 않아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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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버킷리스트’ 포스터 ⓒ(주)해리슨앤컴퍼니
그중에 하나인 롭 라이너 감독의 2008년도 작품 ‘버킷리스트’. 두 노배우(잭 니컬슨과 모건 프리먼)의 있는 그대로의 연기가 녹아 있고 나이만큼이나 인생을 통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명작은 아니다. 다만 그때보다는 20년이 지난 지금 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것은 그만큼 삶을 더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나 자신의 것으로 더욱 깊이 받아들일 수 있기에 영화에서 이런 소리도 듣는다. “이제는 당신도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하나하나 실천해보세요.”
버킷리스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물론 영화 때문은 아니다. 한때 일본의 만능 재주꾼 나카타니 아키히로가 쓴 나이에 따라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 시리즈가 유행했다. 버킷리스트이지만 조건이 붙었다.‘성공한 인생’이라는. 그래서 10대에게는 ‘미래가 없는 일을 하지 마라’, ‘부모 품에서 벗어나라’, ‘평생 잊지 못할 자랑거리를 만들어라’라고 했다. 20대에게는 ‘자기가 좋아하는 한 가지 일을 찾아라’, ‘현장에서 실패하는 경험을 맛보라’라고 했다.
그러나 진짜 버킷리스트는 ‘성공’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선택이다. 사실 후회가 적은 삶은 몰라도 후회가 없는 삶이란 없다. ‘버킷리스트’는 바로 그 후회를 줄이는 일을 죽기 전에 꼭 하라는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꼭 시한부 인생만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 앞에 선 인간’ 은 그 죽음이 주는 절대적인 절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건강하다고 아직 살아갈 날이 많다고 버킷리스트가 차고 넘치지는 않는다.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못한 것이 엄청날 텐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막상 적어보면 50개는 고사하고 10개도 꼽기가 만만치 않다. 영화 ‘버킷리스트’의 에드워드(잭 니컬슨)처럼 갑부가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포기’하는 것들도 많다.
가난하기 때문에 버킷리스트를 채울 수 없는 걸까. 흑인 노인 카터(모건 프리먼)는 “아니”라고 말한다. 에드워드가 챙겨서 즐겨 마신다는 최고급 커피 루왁과 자신이 좋아하는 인스턴트커피만큼이나 현실의 차이는 있지만 그에게도 ‘꼭 하고 싶은 것들’은 있다. 오히려 에드워드보다 그가 먼저 대학 신입생이었던 시절, 철학 교수가 말한 것이 생각나서 그것들을 종이에 적어본다.
45년 전에는 ‘최초의 미국 흑인 대통령’ 같은 것들이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앞둔 지금 그에게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이란 겨우 장엄한 광경보기, 낯선 사람 도와주기, 눈물이 날 때까지 웃기 같은 것들이다. 가난한 그의 처지로는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더 이상은 적어 넣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버킷리스트’는 그런 그에게 ‘기적’을 준다. 괴팍하고, 안하무인에 다혈질인 에드워드가 사려 깊고 너그러운 카터의 우정을 받아들여 함께 버킷리스트를 완성하도록.
거기에는 카터가 돈 때문에 엄두를 못 낸 것도 추가된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그들의 ‘버킷리스트 10’ 에는 스카이다이빙, 최고급 자동차인 무스탕 셸비로 경주하기, 최고 미녀와 키스하기, 몸에 문신 새기기, 이집트 피라미드 보기, 오토바이로 만리장성 질주하기, 아프리카에서 호랑이 사냥 등이 들어간다. 물론 여기에는 갑부인 에드워드의 ‘돈’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것들도 많다.
영화니까 얼마든지 가능하다. 위화감을 느끼거나 포기할 필요도 없다. 삶에는 돈보다 소중한 것들이, 돈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버킷리스트’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카터의 ‘눈물이 날 때까지 웃기’는 에드워드에게 ‘루왁’의 유래를 이야기해주면서 ‘최고의 미녀와 키스하기’는 카터가 보낸 편지를 읽고 에드워드가 고집을 꺾고 처음 어린 손녀를 만나 입맞춤을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버킷리스트는 우정과 사랑으로 완성된다.
에드워드는 단란한 가정도 없고, 딸과의 화해도 불가능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터와 함께 ‘버킷리스트’를 하나하나 실천하면서 어느새 ‘그냥 사람’으로 돌아왔다. ‘버킷리스트’는 우리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도 하지만, 되찾으라고도 말한다. 삭막한 세상에서 오로지‘나’만을 위해 발버둥을 치다가 자신도 모르게 잃어버린 시간들.
최근 보도가 된 말기 암 선고를 받고 항암치료를 포기한 일본의 한 기업인이 지인과 친구 1000여 명을 초청하는 감사의 모임을 연 것도 바로 ‘버킷리스트’가 아닐까. 우리는 새 해를 맞으면서 결심 한두 가지쯤은 정한다. 그것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보다는 정말 해보고 싶은 일, 작지만 소중히 간직해온 꿈, 스스로 마음을 여는 일이라면 좋겠다. 영화 버킷리스트가 2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후회는 늘 머뭇거림에서 오니까. 혹시 아나. 그런 것들로 ‘버킷리스트’를 채우면 카터처럼 ‘기적’을 만날지.
이대현│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