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77세. 나날이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있으니 앞에 노(老) 자를 붙이기는 해도,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다. 그러나 배우, 그것도 여배우라면 전성기를 지난 지 까마득하다. 주연은 고사하고 조연도 맡기가 녹록지 않다. 요즘 워낙 케이블 채널들이 많아 드라마라면 모를까, 영화에서는 설자리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고령화 사회라고 하지만 드라마도, 영화도 젊은 스타들의 차지인 것은 아직도 여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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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1961년 라디오 성우로 시작했으니, 목소리 연기까지 합하면 배우로 57년째 살고 있다. 그동안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을 넘나들며 참 많이,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연기했다. 그녀 자신도 150편 가까운 작품을 다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화려한 주연배우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처음부터 배우로 출발한 것도 아니고, 뛰어난 미모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스타’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배우가 갈 수 있는 길이란 뻔했다. 나문희도 젊은 나이에 늙은이가 되었고, 때론 조연도 아닌 단역도 맡았다. 그녀의 앞에는 늘 내로라는 당대 선배나 동료 스타들이 있었고, 뒤에는 매력이 넘치는 젊은 배우들이 밀려왔다. 그녀는 그들의 친구나 언니, 엄마가 되었고, 그들을 더 빛나게 하는 일을 했다. 그녀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 안으며 연기자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역이라도 타고난 부드럽고 정이 듬뿍 넘치는 목소리와 따뜻한 마음으로 녹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배우 나문희는 그렇게 살아왔다. 삶이 곧 연기이고, 연기가 삶이 아닌 배우가 있으랴마는 그녀에게 연기는 순응의 시간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사랑했고, 그 자리가 아무리 낮고 거칠고 춥고 차가워도 박차거나 버리지 않았다. 그것이 연기이고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연기는 세월을 속이지 않는 ‘진솔한’ 모습이 되었다. 연기가 진짜 삶 같고, 삶이 연기에 그대로 녹아나는 배우, 팔순을 바라보는 나문희의 지금 모습이다.
지난 12월 9일,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영평상)에서 그 노(老)배우가 생애 처음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원인 나도 그녀의 수상에 기꺼이 동의했다. 위안부 할머니를 다룬 영화여서 ‘애국심’이 작용한 것도, 늙은 나이에 힘든 주연을 맡은 것에 대한 예우나 배려도 아니었다.
반세기가 넘는 동안 세월의 바람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맞으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그녀의 연기가 너무나 깊고, 생생하고, 아름답고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나만이, 평론가들만이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 캔 스피크’에서 도깨비 같은 문옥분 할머니를 만나본 관객들이 먼저 느꼈을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얼마 전 청룡영화제도 그녀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영화에서 그녀는 유별나지도, 억지로 한과 슬픔, 분노와 절망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비슷한 역사적 아픔의 시대를 살아온 할머니로서의 공감과 애달픔을 연기 속에 투영시켰다. 그것이 오히려 위안부 할머니들을 울렸고, 우리의 가슴을 절절하게 했다. 오랜 시간 실제 삶과 연기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삶과 연기를 하나로 녹여낼 수 없는 배우에게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모습이다.
‘아이 캔 스피크’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칠순을 넘기면서 나문희는 영화 곳곳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모니’에서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할머니 사형수 김문옥, ‘수상한 그녀’에서 소녀 시절 가난으로 꺾인 가수의 꿈을 잃지 않고 사는 칠순의 욕쟁이 할머니 오말순이 바로 그녀였다.
영화만이 아니다. 연극 ‘잘 자요, 엄마’에서 가슴 절절한 모녀의 사랑을 펼친 어머니 델마도 나문희다, 영화에서 브로드웨이 연극을 거쳐 우리나라에서 연극으로 올려진 ‘황금연못’에서 늙은 남편과 딸의 아름다운 화해를 돕는 에셀도 나문희에 의해 우리의 어머니가 됐다. 신구, 주현, 김혜자 등 내로라는 노배우들과 함께 나와 우리에게도 곧 닥칠 노년의 쓸쓸함과 간절함, 슬픔과 안타까움, 희망을 감동적으로 전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큰 언니인 문정아는 또 어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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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인기나 돈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인생만큼이나 세월이 스며들고 쌓인 연기를 하는 노(老)배우들의 모습은 어디서나 아름답다. 캐서린 햅번은 일흔네 살 때인 1981년 영화 ‘황금연못’으로 네 번째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고도 연기를 멈추지 않고 발목이 부러져 휠체어를 타고도 무대에 올랐다. 할리우드에만 그런 노배우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배우들이 많았고, 지금도 많다. 물론 나문희도 그럴 것이다. 캐서린 헵번이 영화에서 맡았던 역을 우리 연극에서는 그녀가 맡은 것은 결코 우연도, 배우가 없어서도 아니다.
그런 노배우들에게 갈채를 보내는 것은 단순히 영화와 드라마에서 특별한 연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작품 속에서 대신한 노년들이 고령화시대인 지금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고, 멀지 않은 날에 우리의 삶이자 희망이기 때문이다. 나문희의 주연상 수상은 노년의 삶이 더 이상 세상의 조연이나 단역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영평상 시상식에서 나문희는 이렇게 말했다. "이 나이에 나름대로 학구적이고 진실을 더 많이 들여다보면서, 이제 100세 시대라고 하니까 우리 노년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젊은이들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이어진 청룡영화제에서의 수상 소감에서는 “나의 친구 할머니들, 제가 상을 받았어요. 여러분도 그 자리에서 열심히 해서 모두 상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라고 했다.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언제, 어디서든, 어떤 것이든 주어진 그 자리를 소중하고 가꾸는 것, 그것이 인생의 상이고 주연인지도 모른다.
이대현│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