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는 사실적인 묘사의 전통을 갖고 있다. 서양화는 애당초 이차원 평면을 삼차원 공간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데 주력한 미술이었던 까닭에 태생적으로 우리의 눈을 현혹하는 경향이 있다. 그 전통에 유희의 정신이 더해져 나온 그림이 트롱프뢰유(trompe-l’oeil)다.

▶ 코르넬리스 헤이스브레흐츠, ‘그림의 뒷면’, 1670년, 캔버스에 유채, 66.6x86.5cm, 코펜하겐국립미술관
일반적인 서양화를 보고 사실적이라고 느끼기는 해도 우리는 그걸 실물로 혼동하지는 않는다. 트롱프뢰유는 다르다. 서양미술 특유의 사실성을 고도로 부각시켜 의도적으로 착각을 유도한다. 그래서 지금 착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보는 이는 감각적으로 그 착각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트롱프뢰유는 사실성이 매우 강해 이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이 실물인지 그림인지 혼동하게 만드는 그림을 말한다. 트롱프뢰유라는 말 자체가 눈속임을 의미한다. 자연히 캔버스보다는 실제 벽이나 가구 위에 그려지는 경우가 많고, 캔버스에 그려져도 프레임 밖으로 이미지가 나와 있는 등 순간적인 착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코르넬리스 헤이스브레흐츠가 그린 ‘그림의 뒷면’은 이런 트롱프뢰유의 특질을 매우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헤이스브레흐츠가 그린 것은 제목 그대로 그림의 뒷면이다. 유화 화포는 보통 스트레처라고 불리는 나무 틀 위에 캔버스 천을 씌워 만든다. 그림은 한쪽 면에만 그려지므로 당연히 캔버스 천은 스트레처의 한쪽에만 씌운다. 그래서 화포의 뒤를 보게 되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스트레처와 천 뒷면이 함께 보인다. 그림에서 나무틀이 연접한 두 개로 그려진 것은 캔버스 천을 지지하는 스트레처와 이를 둘러싼 액자를 함께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림의 뒷면을 그린 이 그림은, 사실성이 매우 높아 못과 캔버스 천의 절단 부분마저 손에 잡힐 듯 생생히 표현돼 있다. 이 그림이 벽에 걸려 있거나 바닥에 내려져 있다면 우연히 이 그림을 본 사람은 그림을 거꾸로 붙였거나 곧 붙이려고 잠시 바닥에 뒤집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다가 이 부분이 그림의 앞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몰래카메라에 낚인 듯 크게 웃거나 “와~” 하는 감탄사를 내지르게 될 것이다.
서양미술사에서 이런 눈속임 그림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욱시스는 포도를 실물과 똑같이 그린 것으로 유명한 화가다.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렸는지 새들이 날아와 포도를 쫄 정도였다고 한다. 눈이 밝기로 유명한 새들을 속일 정도였으니 제욱시스의 사실 묘사는 아주 대단했던 것 같다.
이 소문을 들은 파라시우스라는 화가가 자신도 그에 못지않게 잘 그린다며 제욱시스를 자신의 작업실로 초대했다. 호기심이 동한 제욱시스는 파라시우스의 작업실에 찾아가 그의 그림 앞에 섰다. 그런데 그림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게 아닌가. 제욱시스는 손을 뻗어 이를 치우려 했다. 하지만 그 커튼 자체가 실은 파라시우스의 그림이었다. 제욱시스가 파라시우스의 솜씨에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 얀 판 데르 파르트, ‘바이올린’, 1723년 이전, 유화, 채츠워스 하우스
영화 ‘오만과 편견’의 촬영지로 유명한 채츠워스 하우스에도 널리 알려진 트롱프뢰유 그림이 있다. 채츠워스 하우스는 데번셔 공작의 저택으로,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소유한 건물이자 영국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전원주택이기도 하다. 대대로 내려온 회화와 조각, 장서, 가구 컬렉션으로도 성가(聲價)가 높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얀 판 데르 파르트가 그린 ‘바이올린’이라는 트롱프뢰유 그림이다.
‘바이올린’은 방 한곳의 문에 그려져 있다. 문이 두 겹으로, 문 하나를 열면 또 하나의 문이 보이고 거기에 바이올린과 활이 걸려 있다. 이 두 번째 문에 걸린 바이올린과 활이 그림이다. 웬만큼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도저히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천7백2십3년 또는 그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그만큼 핍진한 사실 묘사로 우리 눈을 한순간에 바보로 만든다.
이 그림을 보며 이런 상상을 해본다. 작은 음악회가 열리던 어느 날 밤, 연주가 끝나자 주인이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청한다. “우리 집에 명품 바이올린이 있으니 그걸로 한 번 연주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인이 문 하나를 열자 또 다른 문에 걸린 바이올린이 고풍스런 자태를 드러낸다. 그 모습에 손님들이 “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문 앞으로 다가간 연주자는 그러나 갑자기 당황해한다. 손을 뻗었음에도 바이올린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이 신기한 그림을 보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놀라고 즐거워했을까. 트롱프뢰유는 이처럼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선사하는 데 창작의 주된 목적이 있었다.
회화에서 사실성의 핵심은 이처럼 눈속임이다. 이차원 평면 위에 삼차원의 세계를 재현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눈속임을 전제한다. 어떻게 이차원의 이미지가 삼차원으로 보인단 말인가? 바로 눈의 한계를 이용해 착각을 하게 하는 것, 곧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눈속임 그림은 이 같은 눈의 한계를 최대한 이용하고 즐기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한계를 오히려 놀이의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이런 트롱프뢰유와 같은 그림은 인간이 지닌 진정한 놀이 정신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은 미술 담당 기자를 거쳐 학고재 관장을 지냈다. <5십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내 마음속의 그림>, <서양화 자신있게 보기>, <이주헌의 아트카페>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