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리에주 빈민가에 있는 한 작은 클리닉. 손바닥만 한 환자 대기실과 계단을 내려가야 있는 서너 평의 진료실이 전부다. 간호사도 없다. 젊은 여의사 제니(아델 하에넬) 혼자 하루 종일 환자들을 진료한다. 그것도 석 달 동안 임시로.
어느 날 그 클리닉에, 제니가 그토록 바라던 큰 의료센터로 출근하기 이틀 전에 진료 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겨 한 흑인 소녀가 인터폰을 누른다. 그러나 제니는 문을 열어달라는 소녀의 간청을 무시했다. 안 그래도 그 시간까지 발작을 일으킨 소년을 응급처치하고 있던 참이라 순간적으로 ‘의사는 쉬지도 말란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 소녀를 기억조차 못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날 경찰로부터 소녀가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에게 묻는다. ‘너는 정말 그 죽음에 아무 잘못이 없느냐’고.
사실 자체만 놓고 보면 그녀는 아무 잘못이 없다. 진료 시간이 한참 지났기 때문에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응급 환자도 아니었다. 당연히 누구도 그녀에게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경찰조차도 “그때 문을 열어줬으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하지 않고 “선생이 죽인 건 아니지 않느냐”며 그녀에게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경찰 말대로 잊어버리고, 다음 날 그녀가 그렇게도 원했고 마침내 가기로 된 큰 의료센터로 출근해버리면 그만이다.
제니는 그렇게 못했다. 세상은 그녀에게 괜찮다고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큰 의료센터도 포기하고 누군지도,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은 것인지도 모르는 소녀의 행적을 찾아 나선다. 이 작고 젊은 여의사의 선택을 통해 벨기에의 거장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인 ‘언노운 걸’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치거나, 무시하거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정말 그런가?” 하고.
제니가 알고 싶은 것은 두 가지였다. 소녀가 누구인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이름도 모른 채 지나가면 가족조차도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무슨 큰 사명감이나 신념으로 거기에 매달린 것은 아니다.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움직였을 뿐이다.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작은’ 클리닉과 의사의 모습이다. 동네가 동네인 만큼 환자 대부분이 독거노인이나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이혼녀와 그 자녀, 아니면 일용직 노동자다. 불법 체류자도 온다. 그녀는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면 가리지 않고 내 할머니, 내 언니, 내 조카처럼 그들을 정성껏 치료해준다.
클리닉에서만이 아니다. 바로 코앞이지만, 그조차 걸을 수 없는 노인이 시시때때로 전화를 하면 근무 시간과 상관없이 왕진 가방을 들고 집으로 달려간다. 한마디 불평도 귀찮은 표정도 없다. 그렇다고 진료비가 비싸거나 왕진 요금을 받는 것도 아니다. 당뇨 환자를 대신해 복지국에 전화해 복지카드 충전까지 해준다. 한 소년은 친구와 함께 ‘우리 동네 의사 선생님’이란 곡을 직접 만들어 그녀에게 불러주는 깜짝 이벤트까지 벌인다.
큰 의료센터 근무도 포기하고 가난한 동네 작은 의사로 남은 그녀가 외롭고 아픈 사람들의 친구, 이웃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고 부럽다. 우리 주위에도 빈곤, 소외와 아픔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있으니까. 거동조차 불가능한 노인들도 있고, 벨기에처럼 아무리 아파도 자기 나라로 추방당할까 두려워 병원에 가지 못하는 불법 체류 노동자도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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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언노운 걸'의 한 장면 ⓒ오드(AUD)
‘언노운 걸’은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히 잊고 지나치거나, 이제는 익숙해져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성찰하게 한다. 우리도 있다고, 우리 모두 같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가 중요하다. 가난하고 늙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의사와 병원은 여전히 멀다.
그들에게 절실한 것은 시설 좋고 뛰어난 능력을 자랑하는 의사가 즐비한 종합병원이 아니다. 문만 열면 갈 수 있는 작은 병원, 집안 사정은 물론 평소 버릇까지 훤히 알고 있고, 전화 한 번이면 언제 어디서든 달려올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 같은 의사다. 그래서 ‘언노운 걸’에서 제니가 대기실로 와서 팔순 할머니의 가방을 들어주면서 부축해 천천히 진료실로 내려가는 마지막 장면이 흐뭇하면서도 오래 남는다.
삶이 고령화, 개인화, 파편화될수록 사람들은 내게 작지만 친숙한 것들을 원한다. 작은 것들이 여기저기서 제각각 숨 쉬어야 더 편안하고 여유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역주행을 하고 있다. 기업도, 마트도, 병원도, 극장도, 식당도 모두 ‘대형’이다. 곳곳의 작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 많던 동네 작은 교회도 요즘 대부분 문을 닫았다. 굳이 큰 교회에 가지 않아도 이웃집처럼, 노인정처럼 언제든 가서 쉬고 서로 나누는 작은 교회야말로 삶에 지치고 늙고 외로운 사람들의 ‘영혼의 쉼터’일 것이다. 좁고 낮으면 어떤가. 가난하면 어떤가. 그곳에 사랑과 평화가 있고, 진솔한 묵상과 기도가 있고, 일상의 고민과 아픔까지 치유하는 ‘힐링’이 있다면.
차를 타고 가서 사람들로 북적대는 큰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는 것도 재미있지만, 늘 가던 동네 ‘작은 식당’에서 주인이 해주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단골손님들과 어울려 때론 즐겁고 때론 슬픈 대화를 마음을 열고 나누는 것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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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심야식당 2'의 한 장면 ⓒ엔케이컨텐츠
아베 야로의 만화에서 드라마로, 이어 영화로도 두 편째 만들어진 ‘심야식당’의 풍경만이 아니다. 실제로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 동네 단골들이 원하는 음식이면 마스터가 자기 먹을 음식을 만들듯 요리를 해주고, 음식뿐만 아니라 허물없이 정(情)과 사연을 서로 나누는 작은 식당이 일본 도쿄와 오사카의 동네 골목마다 어김없이 존재한다.
우리도 이제는 조금씩 ‘가까우면서 작은 것들’의 의미와 소중함을 알아가고 있다. 동네 곳곳의 작은 우체국, 작은 공원, 작은 카페. 작은 것은 작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언노운 걸’의 클리닉, ‘심야식당’의 메시야(밥집)처럼 언제든 ‘문’을 열고 가난하고, 외롭고, 아프고, 늙은 이웃부터 따뜻이 맞아주는 곳이 돼야 한다.
이대현 |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