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의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긴 시간 지병과 합병증으로 고생하셨고, 여러 자식들 가운데서도 H가 내내 그 뒷바라지를 감당해왔다. 노모의 연세와 병증을 고려할 때 누구라도 호상이라고 말할 만하지만, 그래도 그의 슬픔은 크고 깊으리라.
H의 경우처럼 부모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을 때 가정을 꾸리지 않은 자식이 불리해지는 면이 있다. 제 밑으로 딸린 식구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환자 수발과 같은 육체적, 감정적 노동 강도가 센 일을 떠맡게 된다거나, 집안 대소사마다 자의든 타의든 상당한 경제적 부담을 떠안게 된다거나. 그동안 나와 주변 지인들은 고령의 환자인 모친보다 볼모(?)로 붙들린 H의 처지를 염려했다. 자발적 희생이었든, 은근 몰아가는 분위기였든, 아무튼 H가 의연히 어머니를 책임진 덕분에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고통 분담의 비중을 줄일 수 있었을 테다. 중증환자의 가정 간호란 가족이라는 의무감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당사자인들 모를까. 그럼에도 H의 마음가짐은 굳건했다. 옆에서 오지랖 넓은 참견을 할 때에도 그는 웃으며 말했다. 몸의 고단함이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하기에 마음만은 행복하다고.
나는 그의 우직한 치사랑이 갑갑했다. 저러다 그가 먼저 쓰러지면 어쩌나. 그의 가족은 왜 그에게 모든 걸 미루나. 저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으나, 그렇다고 그는 그냥 노는 사람인가. 그렇게 내 멋대로 예단했다. 주제넘게 판단했다. 그러나 나는 H의 가족을 질책해서는 안 되는 사람,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오래전 나의 엄마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간호와 보호의 손길이 늘 필요한 약한 존재로 10여 년 가까이 병석에 있었을 때, 나는 우리 가족이 나눠야 할 의무를 회피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멀리 달아났던 사람이 아닌가.
H 어머니의 빈소는 남쪽 도시에 차려졌다. 갑작스럽게 기온이 올라간 날이었다. 벚꽃과 개나리와 진달래는 자취 없어지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조팝꽃과 찔레꽃과 이팝꽃이 흐드러졌다. 28년 전 엄마의 부음을 듣고 황망히 고향으로 내려가던 그해 봄날에도 길가에, 언덕에, 골짜기에 조팝꽃과 찔레꽃이 한창이었다. 그때 내 눈에는 온통 눈부신 그 흰빛들이 모조리 소복으로, 상여꽃으로 보였다. 그날 이후 봄날의 조팝꽃과 이팝꽃과 찔레꽃, 그 흰빛들을 볼 때마다 나의 마른 우물 속 깊은 바닥에도 물기가 고이곤 한다.
만약 내가 스물두 살로 되돌아간다면? 장례식장으로 들어서기 전에 나 자신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어린아이가 된 엄마를 두고 달아나지 않을 수 있을까. H처럼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 역시나 자신이 없었다. 인간이란 한없이 어리석어서 어쩌면 나는 똑같은 불효를 되풀이할지 모른다. 그러고는 희디흰 꽃잎들 지천인 어느 봄날 또다시 너무 늦은 용서를 구할지도 모른다. 미안하다고. 그저 미안하다고. 그저 미안하고 미안하다고.
상복 입은 H는 초췌했지만 그의 눈빛은 떳떳했다.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자의 떳떳함. 나는 그의 당당한 슬픔이 부러웠다. 그의 사랑의 방식이 부러웠다. 돌아오는 길은 멀고 서러웠다. 이별하고 후회하고 그리워하는 봄날의 어느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정길연│소설가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뉴스레터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