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그는 유럽 근대 철학을 정립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대단한 평가를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이념 정립을 위해서도 앞장섰다. 그중 하나가 ‘평화 이념’이다. 근대적 의미의 평화 이념은 칸트에게서 시작됐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유럽에서는 여러 차례 큰 전쟁이 일어났다. 14~15세기에 걸친 백년전쟁, 16세기의 프랑스 위그노 전쟁, 17세기의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30년 전쟁 등이 잇따라 일어났다.
칸트가 살았던 시기에도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7년 전쟁과 미국 독립전쟁, 그리고 나폴레옹의 원정 전쟁 등이 그 시기에 일어난 대표적인 전쟁이다. 독일 내에서도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독일은 통일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30년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여러 개의 나라로 갈라져 갈등하고 있었다.
이렇듯 전쟁이 잇따라 일어나는 시기에 평화에 대한 염원은 당연한 것이었다. 칸트는 76세가 되던 1796년에 평화에 관한 생각을 밝히는 글을 발표하고, 그 제목을 ‘영구평화론’이라고 했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칸트는 일시적 전쟁 중단을 생각한 게 아니었다. 항구적인 평화를 어떻게 이룰지가 그의 관심사였다.
칸트는 ‘전쟁이 아닌 상태’와 평화를 구별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장차 전쟁의 화근이 될 수 있는 내용을 유보한 채 맺은 어떠한 조약도 평화조약이라 할 수 없다”고 했다. ‘영구평화론’을 발표하기 1년 전에 프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바젤 조약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 조약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의 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즉, 전쟁의 중단이 곧 평화는 아니라는 얘기였다.
칸트는 진정한 평화를 이루려면 평화 상태에 대한 보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한 보증이 없다면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는 평화를 이루기 위한 국내외적 보증 수단을 제시했다.
칸트가 제시한 국내적 보증 수단은 ‘민주공화제’이다. 모든 국민이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 여부를 결정하려면 국민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국민은 전쟁으로 인한 재앙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국민에게 전쟁 여부를 결정할 권리가 주어진다면 국민들은 전쟁에 반대할 것이다.
칸트가 제시한 국외적 보증 수단은 자유로운 교역이다. 자유로운 교역은 국가 간의 상호 이익을 증진시킨다. 전쟁은 자유로운 교역과 양립할 수 없다. 국가들은 이익을 위해 평화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자유 교역이 평화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현실에서 보면, 칸트의 평화론을 두고 ‘영구평화론’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대다수의 국가들이 민주공화국이고 자유로운 교역을 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분쟁이나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칸트의 평화론을 그 당시 상황 속에서 보면 의의를 알 수 있다. 칸트가 살았던 시대에는 여전히 절대왕정이 유지되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지만, 대다수의 국가에서 국민의 다수가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상업이 발전하고 있었지만, 정부의 통제를 받아 국제 교역이 원활하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국민의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 그리고 자유로운 무역을 주장한 것은 대단히 진보적이었다.
칸트의 평화론은 오늘날에도 두 가지 측면에서 유효하다. 첫째, ‘전쟁이 아닌 상태’와 평화를 구별했다는 점이다. 20세기 중반에 40여 년간 지속된 ‘냉전(Cold War)’을 생각해보면 그 구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냉전 시기는 표면적으로는 전쟁이 아닌 상태이다. 그러나 그 시기를 평화의 시기라 할 수 없다.
냉전 시기에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양대 진영이 치열하게 군비경쟁, 핵무기 경쟁을 벌였다. 냉전 시기의 산물이 한반도의 상황이다. 남북이 분단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3년간의 전쟁 끝에 휴전협정을 맺고 총성은 멈췄다. 그렇다고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휴전은 말 그대로 전쟁을 일시 중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든 전쟁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그래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항상 국제적 톱뉴스가 됐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한반도가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 냉전체제가 해제됐다. 하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휴전 상태’이다. 그것은 칸트가 말한 대로 ‘전쟁이 아닌 상태’일 뿐 평화의 상태가 아니다.
칸트의 평화론이 유효한 두 번째 측면은, 그가 전쟁 여부를 국민의 권리와 결부시켰다는 점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전쟁은 영토 확장, 경제적 이해관계, 이데올로기 또는 종교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 일어났다. 그러나 원인이 무엇이든 국민의 뜻보다 소수 지배층의 의도나 이익을 위해 전쟁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참상을 겪는 당사자는 국민이다. 2015년 9월 한 장의 사진이 전 세계인에게 충격을 주었다. 시리아 난민인 세 살배기 어린이 아일란 쿠르디가 터키 남부 해변에서 숨진 채 엎어져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은 난민의 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국민들 역시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었다. 한국전쟁으로 200만 명 이상의 국민이 사망했고,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이렇듯 전쟁의 재앙을 직접 겪는 당사자가 국민이지만, 국민은 전쟁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전쟁 여부를 국민이 결정한다면 국민은 당연히 전쟁을 반대할 것이다. 전쟁이 국민 개개인의 삶 전체를 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추상적 당위가 아니다. 평화는 국민의 삶과 직결된다. 따라서 평화를 이루고, 또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칸트는 “평화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우선 냉전적 사고를 해체하고 평화사상을 굳게 세우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흔히 말하는 ‘힘을 통한 평화’는 냉전적 사고의 전형이다. 겉으로는 평화를 말하지만 뒤로는 핵무기 개발경쟁을 했던 것이 ‘힘을 통한 평화’의 실상이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 아닌 상태의 유지를 의미할 뿐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평화사상의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오늘날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했다 하여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고구려인의 생각은 다르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영토 확장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한 것”이라고 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문무왕은 유언에서 삼국통일이 아니라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게 한 것”이 자신의 업적이라고 했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모든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평화사상의 요체이다.
냉전체제가 해체된 지 30년이 됐다. 그런데 냉전시대의 산물인 한반도 내의 상황은 아직 해체되지 않았다. 미래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변화의 가속화 여부는 평화에 대한 열망에 달려 있다. 구시대 유물인 냉전적 사고를 극복하고, 평화를 위해 마음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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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기│<한국 철학 콘서트>, <철학자의 조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