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로서는 참으로 분하고 얄미운 일이었다. 지금부터 130년 전인 1866년(고종 3년). 선교사를 박해했다는 이유로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했다. ‘병인양요’라고 부르는 구한말의 이 사건에서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난입해 340여 책을 약탈했다.
그들이 가져간 의궤 297권은 500여 년 조선 왕실의 행사를 기록한 것으로 의례의 전 과정이 한지에 천연물감으로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우리에게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더없이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외규장각에는 의궤 말고도 많은 책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머지는 불태우고 가장 문화적 가치가 있는 의궤만 가져갔다. 그것도 역사학자도 아닌 일개 프랑스 해군이. 이런 그들의 안목을 얄밉다고 해야 할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게다가 프랑스 해군은 약탈한 의궤를 사사로이 가지거나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파리국립도서관으로 보냈고, 도서관은 그것을 백삼십년 동안 손상 하나 없이 원형 그대로 보존했다.
어떻게 그들은 수많은 책 중에서 의궤만을 골랐을까. 장정이 깔끔해서? 그림이 신기해서? 채색이 아름다워서? 아니면 한눈에 귀중한 문화유물임을 알아서?
프랑스가 세계 제일의 문화 강국이자 문화가 만들어놓은 가장 매력적인 나라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 이유가 제국주의 시절 약소국에서 약탈한 엄청난 유물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국가는 문화와 예술의 가치를 존중하고 지켜주며, 국민은 문화적, 예술적 자존심과 감수성을 삶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그들은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문화의 ‘힘’임을 알고 있다.
천구백오십구년 드골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정부에 문화부를 만들고 초대 장관에 작가인 앙드레 말로를 전격 임명했다.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은후보 시절에 "모두에게 문화를"이라고 외쳤다.
프랑스는 그런 나라다. 그런 만큼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도 대단하다. 문학, 미술, 음악, 건축은 물론 대중문화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할리우드의 끈질긴 공세에도 프랑스는 아직도 자국 영화 시장 점유율을 절반 이상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문화를 맹목적으로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문화 국수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눈과 가슴을 열고 다른 민족과 국가, 지역의 문화예술이 가진 고유의 색깔과 맛을 찾아내고 즐길 줄 알며, 그것을 통해 교감하고 소통할 줄 안다.
우리 문화와 예술에 대해서도 그랬다. 칸영화제는 일찌감치 임권택, 홍상수, 김기덕 감독의 독창성과 예술성을 인정했고, 파리 시민들은 가까운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친숙하게 감상한다.
이미 한류 열풍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 몇 년 전 파리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은 대중가수 전용 콘서트홀인 제니트에서 펼쳐진 K-팝 공연에서 프랑스 젊은이들이 유창한 한국어로 가수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눈물까지 흘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양국 수교 130주년을 맞아 ‘한·프랑스 상호 교류의 해’를기념해 마련한 지난해 ‘프랑스 내 한국의 해’ 행사에서는 개막 공연인 종묘제례악의 품격과 고전미에 프랑스 예술인들은 감탄을 쏟아냈다.
이미 우리 책 2000종을 자국어로 번역·출판한 프랑스는 올해 초 파리 베르사유 전시장에서 열린 ‘2016 파리 도서전’에우리나라를 주빈국으로 모셨다.

▶ 지난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16 파리도서전’에 마련된 한국 특별전시관
문화는 흐르는 물과 같은 것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가치 올라가
올해 ‘한국 내 프랑스의 해’를 맞아 이번에는 그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가져온 문화와 예술이다. 1970년대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를 상영할 때처럼 단순히 자신들의 것을 일방적으로 소개하고 자랑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들의 문화와 우리 문화가 상호 교류하고 융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창조를 모색하고 있다. 연극, 춤, 사진, 영화, 심지어 그들이 자랑하는 음식까지도.
개막작인 국립무용단의 ‘시간의 나이’는 우리의 전통 춤사위와 프랑스의 현대적인 안무로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연결했고, 인간처럼 춤도 결국 뿌리가 같음을 보여줬다.

▶ ‘한국 내 프랑스의 해’ 개막작인 국립무용단의 ‘시간의 나이’.
연극 ‘빛의 제국’ 또한 프랑스만의 것이 아니다. 원작부터 프랑스어로 번역·출판된 김영하의 동명 장편소설이고, 국립극단과 오를레앙 국립연극센터 공동 제작에 프랑스 연출가 아르튀르 노지시엘과 작가 발레리 므레장이 함께 각색하고 연출했다.
이방인인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분단의 현실, 그속에서 아픔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또 하나의 예술로 남을 것이다.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이 이처럼 우리 문화와 예술과 결합하고, 융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런 시도를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의 문화예술에 대한 자부심과전통과 창의성이 그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색깔과 모습은 다르지만 독특하고 역사 깊은 우리의 문화와 예술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한국도 자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50%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다.
국가와 민족 간의 문화 교류에도 조건이 있다. 서로 약속만 한다고 쉽게 주고받을 수 없다. 문화는 물과 같다. 양쪽의 높이가 차이가 나면 일방적으로 흘러가거나 아예 막혀버린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래서 문화에도 할인율(Cultural Discount)이란 게 존재한다. 다른 나라로 들어가려면 언어, 관습, 종교 등의 장벽으로 가치가 떨어진다.
그러나 그보다 문화와 예술 자체의 수준, 그것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국민의 눈과 가슴의 수준이야말로 문화적 할인과 다른 문화와의 교류를 좌우하는 요인일 것이다.
그럼 점에서 프랑스와 한국은 어쩌면 문화적 할인율이 가장 낮은 사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엇보다 문화 교류를 앞세우고, 두나라 모두 지금 문화로 창조와 혁신을 꿈꾸고, 문화융성으로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지 않은가.
올해 연말까지 부산국제연극제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통영국제음악당에서, 교보빌딩에서, 세종문화회관에서, 과천국립과학관에서, 그리고 거리 곳곳에서 ‘한국 내 프랑스의 해’ 행사로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 과학과 음식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그 가능성을한 번쯤 확인해보라. 그리고 나의 프랑스 문화에 대한 할인율은 얼마인지도.

글 ·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2016.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