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 조. 올해 66세의 일본 미스터리 소설 대가인 그의 책 <경관의 피>는 경찰소설의 걸작으로 꼽힌다. 1948년부터 2007년까지를 배경으로 아버지, 아들, 손자로 이어지는 경찰관 삼대의 삶과 죽음, 긍지와 고뇌, 가족애를 서사적 전개와 추리기법으로 치밀하게 그려냈다. 2009년 아사히TV 개국 50주년 기념 특집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되었고, 소설은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출간되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섬세한 관찰로 담아낸 아련한 시대적 정취에 있다. 주인공들은 시대를 이어가면서 오사카 남쪽의 유명한 사찰인 덴노지 부근 한 파출소에 근무한다. 시대에 따라 방식은 다르지만, 그들의 역할과 그들이 보여주는 일상과 주민들과의 관계는 하나같다.
경찰관으로서 주민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들은 안전을 지켜주는 파수꾼이자 친근한 인생의 상담자이고, 다정한 이웃이다. 아무리 사소하고 귀찮고, 자신의 역할과 상관없는 것이라도 마다 않는다. 전후 부흥시대에 경찰관이었던 아버지 세이지는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 식구가 몇인지, 집안 형편이 어떤지 모두 알고 있다. 어느 집 아들이 어느 학교에 다니고, 얼굴만 보고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한다. 하루에도 몇 번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이웃이 되었기 때문이다. 파출소는 상담소이자 대피소이고, 휴식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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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들이 대구 중구 동성로에 있는 중앙파출소 앞에 설치된 치안 조형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일본의 코방(交番), 주민들의 휴식공간 넘어
작은 문화•예술•관광공간으로
아들 다미오나 손자인 가즈야의 모습도 그리 다르지 않다. 시대가 바뀌어 많은 것들이 변했고, 세상은 험악하고 복잡해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다정하고 든든한 이웃이고, 파출소는 언제든 무슨 일이든 받아주고 도와주고 함께 나누는 공간이다. 소설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그렇다.
일본 곳곳에 보이는 코방(交番). 파출소의 속칭이다. 두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작은 곳이 있는가 하면, 제법 번듯한 2층 건물까지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지만 그곳에 근무하는 경찰관과 그들이 하는 일은 같다. 교통 정리, 치안 유지, 긴급 출동, 범인 검거는 당연한 임무이고, 누가 물어도 길을 안내해주고 자전거 바퀴 바람도 넣어준다. 심지어 차비까지 빌려주는 경찰관도 있다. 코방에 경찰관이 없으면 화상으로 바로 통화도 가능하고, 전직 경찰관으로 구성된 ‘코방 상담원’과 무엇이든 의논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코방은 하나의 작은 문화, 예술, 관광의 공간이기도 하다. 도쿄에 가보면 우선 건물의 형태부터 다양하고 개성적인 코방을 만날 수 있다. 주변에 벚꽃이 가득한 친환경 코방, 친서민적인 디자인의 코방, 유명한 건축가가 예술적 감각을 살려 지은 코방, 최첨단 디자인과 소재의 코방. 정말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다. 코방 순례만 해도 충분히 하나의 ‘관광’이 된다.
건물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본적인 의무를 제외하면 건물만큼이나 역할과 기능도 저마다 다르다. 수화를 하는 경찰관이 있는 코방이 있는가 하면, 코방마다 동네 특성과 역사를 담은 다양한 홍보물과 그림, 캐릭터와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이따금 아주 짧은 거리지만 교통을 통제하고, 밤에는 코방에서 대형 조명등을 밝혀 마을 주민들에게 축제의 공간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일본의 파출소 ‘코방’과 일선 경찰관들은 이렇게 주민들의 생활과 밀착해 그들과 소통하고 함께 살아가는 친근한 존재가 되었다. 그 덕분에 본래의 목적인 마을의 치안도 더 좋아졌고, 덤으로 관광 수입까지 올리게 되었다. 일본의 코방을 도입한 브라질 상파울루 역시 범죄가 크게 낮아졌다고 한다.
주민들에게 친근한 파출소와 경찰관
파출소의 새로운 문화 창출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수유6치안센터가 최근 ‘문화파출소 강북’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름만이 아니라 공간과 풍경도 바꾸었다. 여느 파출소(치안센터)와 달리 나눔 부엌도 있고, 돌봄 다락방도 있다. 그곳에서 주민들은 요리 솜씨도 뽐내고, 오감자극 놀이극도 공연한다. 앞으로는 기타 연주, 뮤지컬, 소묘(드로잉)도 가르쳐주고 마을 음악 감상실, 마을 극장도 운영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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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강북경찰서의 수유6치안센터가 ‘ 강북’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에서는 고유의 치안시설 기능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문화예술 및 예술 치유 활동 등도 이뤄진다.
그렇다고 파출소와 경찰관 고유의 임무와 역할을 소홀히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문화예술을 통해 범죄 피해자와 가족들도 치유한다. 파출소가 주민들의 아픔과 고민을 씻어주는 상담소, 주민들이 늘 즐겁고 편하게 찾는 사랑방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고, 어찌 보면 경찰과 파출소가 주민들의 생활과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최고의 선택이다. 일본의 코방에서 보듯, 치안은 많은 경찰관과 그들의 살벌한 감시로 되는 것은 아니다.
경찰청과 문화체육관광부는 시설을 리모델링하고 문화예술 프로그램에 대한 지역주민의 수요조사 등을 거쳐 ‘문화와 예술이 있는 파출소’를 모두 10곳이나 만들겠다고 했다. 그것으로 끝나지 말아야 한다. 전국 곳곳에 있는 모든 파출소가 그렇게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것도 주민들이 먼저 나서서 “우리 파출소도 바꿔달라” 하고 소리쳤으면 좋겠다. 그 자체가 치안을 튼튼하게 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에게 파출소, 경찰은 긴장의 대상이다. 그곳을 지나거나 그들을 만나면 이유 없이 긴장하고 외면하기도 한다. 이런 정서와 문화는 멀리는 일본 식민지 시대의 폭력적 경찰, 권위주의 정치 시대의 고압적 경찰이 남긴 유산이기도 하다. 일본의 코방과 경찰은 벌써 오래전에 던져버렸는데, 우리에게는 아직도 남아 있다.
문화파출소는 어쩌면 경찰 스스로 그것을 버리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그 선언이 잠시, 그리고 한쪽에서만의 ‘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늘, 그리고 어느 마을에서나 누구나 즐겁게 찾아가고, 만나면 반갑고 안심이 되고, 무엇이든 털어놓고 상담하고,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는 파출소와 경찰관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것이 문화가 되는 것이다.
일본의 코방을 부러워할 이유도, 흉내 낼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정서와 지역 특성을 살린 파출소, 경찰이어야 한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문화로 또 하나의 문화를 만드는 대한민국의 경찰과 파출소. 멋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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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2016.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