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아버지’란 제목도 많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직후, 이 세상의 아버지와 자식들을 울리고 위로했던 김정현의 장편소설처럼. 김원일의 소설 <아들의 아버지>처럼 아예 아들까지 내세우거나 앞뒤에 이런저런 수식어를 붙인 작품도 부지기수다. 이탈리아 영화 제목을 그대로 따온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 같은 것들도 있다.
문학에서 아버지는 어떤 모습일까. 이보다 더 크고 무겁고 무한하고 무서운 주제도 없을 것이다. 자식으로, 아니면 아버지로서 누구나 마음속에 아버지를 담고 산다. 작가라고 예외는 아니다. 글을 쓰는 것이 업이기에 그들은 ‘아버지’를 기억 속에 두지 않고 밖으로 끄집어낸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아니면 아버지로서의 자신에 대해, 아니면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문학은 허구이지만 문학 속의 아버지만큼은 사실에 가깝다. 그렇다고 명백한 사실이란 얘기는 아니다. 기억하고 싶은 ‘사실들’이다. 좋든 싫든 과장도 있고, 윤색도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내가 이해한 만큼의 ‘아버지’가 있다.
문학 속의 아버지는 세상 속의 아버지만큼이나 다양하고, 비슷하다. 그 아버지들은 위대한 신화 속의 주인공이 아니다. 아버지에게만큼은 영웅이란 허울을 씌우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아버지,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나’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나와의 관계 속에서 운명 지워진 한 남자를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어쩌면 그 모습이야말로 아버지에 대한 가장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36명의 작가들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회고한 <아버지, 그리운 당신>의 한결같이 아름답고 아련하고 그리운 아버지보다도. 작가들도 작품 속으로 아버지를 불러오지 않고, 그냥 삶에서 기억하고 싶은 아버지가 더 무겁고 작위적인 모양이다.
어떤 관계, 어떤 기억으로 남든 아버지는 아버지다.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해도 소용없다. 아버지로 사는 것도 숙명이고, 그 아버지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것도 숙명이다. 그 숙명은 평생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고, 아버지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내’ 안에 남아 있고, 나는 역시 또 ‘아버지’로서 남아 있다.
많은 문학작품들이 그 숙명의 굴레를 솔직히 드러내거나,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림치지만 결국 거기에 갇히고 마는 자식들의 삶을 담는다. 지난해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김경욱의 단편 <천국의 문>이 그렇고, <칼의 노래>의 소설가 김훈이 6년 만에 내놓은 역작 <공터에서>가 그렇다.

ⓒ강,문학사상
요양원에서 죽음을 코앞에 둔 <천국의 문>의 아버지는 원망의 대상이다. 그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없고, 가족을 해체한 장본인일 뿐이다. 부모가 이혼할 때 가엾은 생각에 아버지를 선택한 딸은 그 때문에 꿈을 포기했고, 지하 단칸방 신세로 전락한다.
딸에게 아버지는 평생 지고 가야 할 멍에이고 짐이고 어둠이다. 그래서 은근히 자신의 인생을 망친 아버지가 빨리 죽어주기를, 그 굴레와 상처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막상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딸은 어둠에서 벗어나 오로라를 만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에게서 아버지와 같은 폭력과 야만을 본다.
<자전거 도둑>에서 구멍가게로 가족의 생계를 겨우 이어가는 아버지는 어떤가. 몰래 소주 두 병을 더 가져오다가 도매상 주인에게 들키자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연극을 하는 비굴한 아버지다. 흐르지도 못하고 눈 속에 괴어 있는 그의 눈물을 보며 어린 아들은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애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라고 다짐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자신에게서 또 하나의 아버지를 발견한다.

ⓒ해냄
김훈은 20세기 현대사를 살아낸 아버지와 그 아들의 비애로운 삶을 담은 소설 <공터에서> ‘작가의 말’에 이렇게 적었다.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마동수는 독립운동을 한다며 중국 땅을 돌아다녔고, 해방이 되어서는 약초를 캐러 다닌다며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있는 집에 몇 달에 한 번씩 들르는 남루한 아버지다. 소설은 그 아버지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한다.
추운 겨울 새벽 술에 취한 채 “식은 녹두지짐 몇 장과 땔나무 한 묶음을 들고” 대문 밖에 웅크리고 있는 아버지의 세상을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결국은 마찬가지이지만 아버지가 “삶에 부딪혀서 비틀거리는 것인지, 삶을 피하려고 저러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마치 일본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 <열네 살>(원제 ‘머나먼 고향’)에서 34년 전, 열네 살로 돌아가서도 끝내 아버지가 왜 그때 가족에게서 떠났는지 물어보지 못한 것처럼.
그리고 마차세도,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던 형 마장세도 끝내 아버지의 굴레와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가 한평생 끌고 온 시간과 지고 온 짐이 소멸했고, 아버지의 몸은 검불 같은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간을 짓눌렀다. 아들이 아버지의 무게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곳은 세상에 없었다.
<공터에서>의 죽은 아버지는 밥 익은 냄새와 고등어 굽는 냄새 속에서 떠오르고, 겨울 추위나 음식 냄새의 끄트머리에서 살아났다. 어느 날 우연히 거울에 내가 아닌 아버지가 있어 깜짝 놀라듯, 마장세는 생김새와 걸음걸이까지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혈연의 사슬을 끊기 위해 베트남 파병생활 후 외국 땅을 떠돌았지만, 그는 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란 어린 시절의 예감에 결국 결박당한 자신을 발견한다.
이렇게 우리 소설은 초라하고, 어둡고, 남루하고, 때론 비굴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솔직하다. 그것은 결코 미움이나 원망이 아니다. 아버지의 무게와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와 역시 그런 아버지일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긍정이고, 연민이다. 이 또한 숙명이 아닌가.
이대현 |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