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과학상식과 뒷담화의 보고
사라진 스푼

원소 주기율표. 오랜만에 본다. 고교 화학 시간에 접하고 처음 아닐까? 복잡했고 줄줄이 외울 게 많았다. 이 책 <사라진 스푼>은 주기율표 이야기다. 저자 샘 킨은 미국 과학작가. 찾아보니 <바이얼리니스트의 엄지>와 <뇌과학자들>이란 책도 한국에 소개돼 있다. 지명도가 꽤 있다는 얘기.
처음에는 좀 딱딱하다고 생각했다. 다 읽고 나서는 만만치 않은 책이라는 느낌이 왔다.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이다. 주기율표상의 112개 원소에 관한 만담(萬談), 즉 만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 물리학과 화학에 관한 거의 모든 게 담겨 있다. 이 한 권만 독파하면 순식간에 ‘과학 덕후’로 행세할 수도 있겠다.
‘과학 덕후’가 되는 책
DNA 이중나선구조의 발견 과정, 원소 92개는 우주에서 어떻게 벼려지는지, 방사능의 발견과 원자물리학 시대의 탄생, 양자물리학의 탄생을 낳은 보어의 전자모델 설명, 지구 나이를 계산한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클레어 패터슨 이야기….
과학책 수십 권에 담긴 물리학-지구과학-화학의 정수다. 이 책을 뒤늦게 접한 게 아쉬울 정도였다. 과학책을 어떤 순서로 읽어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나는 빙빙 돌아왔다.
상식과 뒷담화도 많다. 저자는 “연구를 잠시 멈추고 나서 뒷담화를 들려주길 좋아하는 은사
몇 사람이 있었다”고 뒷담화를 모은 이유를 말한다. 그 중에서도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 가면 볼 수 있는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의 알루미늄 첨탑 장식이 흥미로웠
다. 의사당과 링컨 기념관 사이에, 고대 이집트 첨탑인 오벨리스크 디자인의 워싱턴 기념탑이 있다. 끝이 뾰족한데 그 꼭대기가 어떻게 돼 있는 줄은 몰랐다. 샘 킨의 글을 읽고서야 알루미늄으로 장식돼 있다는 걸 알았다. 몇 년 전 워싱턴 기념탑을 지났는데, 그런 줄 알았으면 눈여겨봤을 텐데. 2.7kg의 알루미늄 괴라고 한다.
캔 재료로 사용되는 값싼 알루미늄이 대체 왜 미국 수도를 상징하는 건축물 맨 위에 올라가 있을까 의문이 생겼다.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나 피라미드 꼭대기는 금으로 장식했었다. 그 금이라면 알겠는데, 1884년에 워싱턴 기념탑을 만든 미국 정부는 왜 알루미늄을 사용
했을까? 그건 당시 알루미늄이 금보다 귀한 금속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 알루미늄 피라미드에서 알루미늄을 1온스만 깎아내도, 그것으로 작업에 투입된 모든 근로자 일당을 줄 수 있었을 거라고 한다. 알루미늄은 19세기 초에 처음으로 금속으로 추출돼 약 60년 동안 최고의 귀금속으로 지위를 누렸다. 워싱턴 기념탑의 알루미늄은 옛 영
화를 증명하는 셈이다.
‘로듐 디스크’란 용어,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음반이 대박 나면 골든디스크, 그거보다 더 팔리면 플래티넘 디스크라고 한다. 1979년 비틀스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가 역사상 최다 앨범 판매 기록을 세운 음악가가 된 걸 기념하기 위해 <기네스북>은 그에게 로듐 디스크를 만들어 선물했다. 원자번호 45번인 로듐은 금속 원소 중에서 무게로 따져 가장 비싸다고 한다.
<사라진 스푼>과 일본
내가 이 책에서 제일 흥미롭게 본 건 원소에 자기 고국의 이름을 남기려고 한 과학자들이다. 옆 나라 일본 이야기는 특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2016년 한 원소가 전 일본을 뒤흔들었다. ‘니호니움(Nihonium)’, 원자번호 113번. 자연에는 없고 인간이 합성한 원소다. 주기율표상에 원소 이름을 등재하는 기관이 니호니움을 공식으로 인정한다고 발표했을 때 일본이 기쁨으로 들썩들썩했다. 신문 1면 톱. 규슈대학교의 모리타 고스케 교수가 일궈낸 성과로, 원소를 발견한 사람이 작명권을 갖는데 그는 조국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원소에 일본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는 100년 만에 일본이 굴욕을 딛고 얻은 것이라 일본인들의 감동은 특히 컸다. 도호쿠대학교 학장이었던 오가와 마사타카는 1908년 43번원소를 발견했다며 이 원소 이름을 ‘닛포니움’으로 지었다. 1908년이면 한일병합 전인데, 일본과학이 이미 그 정도 수준이었다는 게 놀랍다. ‘닛포니움’이란 이름은 1910년부터 약 10년간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오가와가 새 원소를 발견하기는 했으나 43번 원소는 아닌 게 나중에 드러났다. 그는 “창피함을 느끼고” 닛포니움 발견을 철회해야 했다. 그로부터 100년 뒤 후학이 선배 학자가 못한 국가적 숙원을 풀었다.
<사라진 스푼>에 나오는 동아시아 이야기는 일본밖에 없다. 중국도 보이지 않고, 한국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은 카드뮴 원소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또 나온다. 원자번호 48번 카드뮴은 탈륨, 비스무트, 폴로늄, 납과 함께 독성 원소로 유명하다. 이 카드뮴이 바로 이타이이타이병의 원인. 이타이이타이병은 중금속 중독이 일으킨 환경 질병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이 병을 일으킨 카드뮴이 바로 가미오카 광산에서 마구 버려진 것이었다.
‘가미오카’ 하니 생각나는 게 있다. 바로 2015년 일본에 노벨물리학상을 안겨준 광산 이름이다. 이 광산에 중성미자 검출을 위한 지하 시설을 설치했는데, 도쿄대학교 가지타 다카아키 교수가 이곳에서 중성미자 검출에 성공한 것이다. <사라진 스푼>은 2010년에 쓴 거라서 이 ‘슈퍼-가미오칸데’ 실험실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이타이이타이병을 일으킨 것으로 악명 높은 광산이 일본에 노벨상이라는 영광을 안겨준 진원지로 탈바꿈하다니. 그 중금속 피해자들이 아직도 일부 살아 있을 텐데 그 느낌이 어떨지?
과학을 공부하면 국가 간 경계가 흐려지고, 인종 간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더 큰 게 보이니까. 그런데 <사라진 스푼>을 보니, 잠시 내 마음속 국경이 살짝 또렷해졌다. ‘코리아늄’은 언제 보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최준석 | 주간조선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