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이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도시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지는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과 함께 한양 성곽(城郭)을 꼽을 수 있다. 조선 건국 후 한양이 도읍으로 결정된 데는 산 네 곳이 도시를 병풍처럼 감싼 점이 큰 구실을 했다. 1394년(태조 3년) 10월 28일 한양 천도 후 정도전 등이 중심이 되어 도시설계 작업에 착수했는데, 대표적 사업이 북쪽의 북악산(백악), 동쪽의 낙산, 남쪽의 목멱산(남산), 서쪽의 인왕산을 연결하는 한양 도성 건설이었다.
1394년 11월 3일 최고 회의기구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는 새 도읍지 건설 후 가장 먼저 할 일로 종묘와 궁궐을 세우는 것과 함께 성곽을 쌓을 것을 건의했다. <태조실록>엔“종묘는 조종(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을 내는 것이며,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 이것은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건의했음이 나타난다.
종묘, 궁궐과 함께 한양도성 건설을 3대 역점사업으로 추진한 태조는 정도전으로 하여금 성곽 축조를 명했고, 공사 추진 기관인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구성했다. 도성 축조는 전체 성터를 측량해 총 97개 구간으로 나누고, 1396년 1월부터 서울과 각 지방의 백성 11만8000여명을 징발해 완성했다. 공사 구간은 <천자문(千字文)>의 글자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다. 백악을 기준으로 동쪽에 천자(天字)부터 시작해 백악의 서쪽에서 천자문의 마지막 글자인 조자(弔字)로 끝나게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엔 이 산들을 이은 성곽의 둘레가 9975보(步)로 약 18.627킬로미터임이 기록되어 있다. 각 구간별 책임 지역과 책임자도 성곽 돌에 함께 새겨놨는데, ‘흥해시면(興海始面)’과 같이 경상도흥해(현 포항시) 지역 인부들이 이 구간을 공사했음을 알 수 있다.
한양 도성은 태조 대인 1396년 처음 완성된 이후 두 번의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쳤다. 세종은 1421년(세종 3년) 10월 13일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을 설치하고 32만여명을 동원해 도성 보수공사를 시작해 1422년 완성했다. 세종 이후 도성의 전면 개축은 숙종 대에 이뤄졌다. 태조 대에 다양한 크기의 자연석을 규칙없이 쌓았고, 세종 대엔 아래쪽은 크고 위쪽은 작은 돌을 사용한 데 비해 숙종 대엔 네모나게 다듬은 규격화된 돌을 사용했음을 현재도 확인할 수 있다. 시기에 따라 쌓은돌이 다른 것은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가 그린 <부상도(負商圖)>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양 도성은 외적의 공격을 막는 방어 기능과 더불어 도성 안의 백성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려는 목적에서 세워졌다. 6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한양 도성은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는 현장이자 시민 휴식공간으로 새롭게 떠올랐다. 세계에 많은 역사 도시가 있지만, 서울처럼 대도시에 도성이 온전히 유지되는 곳은 매우 드물다. 새해엔 한양 도성 길을 거닐면서 서울이 축적한 역사와 문화의 힘을 직접 체험해볼 것을 권한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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