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렸다. 8월 20일부터 26일까지 남북 이산가족이 2박 3일씩 두 차례에 걸쳐 헤어진 가족을 만났다. 생사 여부도 확인하지 못한 채 70여 년을 살아온 그리움을 풀어내기에는 너무 짧은 만남이었다.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상봉 신청자는 현재 13만 2603명이다. 그중 7만 5741명이 세상을 떠났고 5만 6862명이 아직도 상봉을 기다리고 있다. 연령별로 살펴보면 90세 이상이 21.4%, 80세 이상이 41.2%로 대부분이 고령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가족을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나는 이산가족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또한 부부·부모·자녀를 찾는 비율이 43.7%, 형제·자매를 찾는 비율이 31.4%지만 8월 20일 금강산 상봉장을 방문한 남측 이산가족 89명 가운데 7명만이 부모·자녀를 만났다. ‘로또’ 같은 상봉에 선정되고도 만날 수 있는 가족이 남아 있지 않아서다. 때문에 대다수가 처음 보는 조카, 며느리, 사위를 만나 먼저 떠난 가족의 소식을 묻는 풍경이 연출됐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 선언에서 각각 100명씩 상봉하자는 데 합의했음에도 막상 89명밖에 만나지 못한 상황도 설명이 된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 최근 1년 사이에도 약 1200명이 증가했다. 이산가족으로 등록하면 월남자 가족이라고 북에 있는 가족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또는 남한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산 것이 북에 있는 가족에게 미안해 상봉 신청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신청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급함 때문일 것이다. 또는 앞서 했던 걱정보다 죽기 전에 가족을 만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수도 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2000년부터다. 이번 제21차 상봉에 이르기까지 18년 동안 남북은 각각 이산가족 100명씩 2~3일의 짧은 만남을 허락했다. 지금까지 정부 차원에서 약 4000명의 가족이 만남을 가졌다. 단순 계산으로 남은 5만여 명이 가족을 만나려면 앞으로 200년이 걸린다는 뜻이다. 이러니 대부분의 이산가족이 상봉을 포기하고 살 수밖에 없다.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생사 확인·서신 교환·화상 상봉 현실적 접근부터
이산가족이 가장 바라는 일은 생사 확인이다. 가족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 실종되면 찾아 나서고 죽음을 맞이하면 유해라도 수습하는 게 당연한 이치지만, 유독 이산가족에게는 이러한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분단으로 인한 비극을 개인에게 감내하라는 건 참 잔인한 일이다.
가족의 생존이 확인되면 서신 교환이 가능해져야 한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 있어도 전화로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세상이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서울에서 북에 있는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지금도 의지만 있다면 서신 교환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디지털 시대임을 활용해 편지, 사진 등을 스캔해 보낼 수도 있다.
아울러 화상 상봉을 도입해야 한다. 이 또한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남북은 2005년부터 일곱 차례에 걸쳐 화상 상봉을 실시한 바 있다. 물론 직접 손을 잡고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대면 상봉에 비할 수는 없지만 이산가족은 이마저도 절실하다. 실제로 화상 상봉이 이뤄진 시기에 상봉 인원이 늘어났으며, 재상봉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도 의의는 컸다. 고령의 이산가족 5만여 명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재개가 시급하다.
화상 상봉은 북한에서 더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 대면 상봉을 100명으로 제한하는 이유는 주로 북한에 있다. 북한 체제적 요소도 있지만 북한의 좋지 않은 도로 사정도 작용한다. 지방에 있는 상봉 대상자와 동반 가족이 금강산으로 오는 데 2~3일이 소요되는데, 한 번의 상봉을 위해 재북 이산가족이 왕복하는 데 열흘이 걸리는 셈이다. 따라서 화상 상봉 장소를 각 지역에 조성한다면 북한의 부담도 줄어들 것이다.
한편 이번 상봉에는 생존이 확인된 6명의 국군포로·납북자 가족이 참여했다. 이들은 특수이산가족으로 제2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부터 일반 이산가족 명단에 섞어 상봉을 진행했다. 국군포로들은 북한의 사상교육을 받고 전후 복구 등에 동원됐으며 사회에서 큰 차별을 받으며 살았다. 국군포로·납북자 가족을 위해 특단의 방법도 검토해야 한다. 독일은 통일 전 서독이 동독에 있는 정치인을 현금과 물자를 제공해 데려왔다. 독일어로 ‘자유를 사다’라는 뜻의 ‘프라이카우프(freikauf)’다. 한국판 ‘프라이카우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근본적 문제 해결 시급
이산가족은 우리 민족이 겪는 비극의 한 단면이다. 나 또한 이산가족이어서 그 심정을 잘 안다. 남한에 내려온 아버지와 나는 고향에 남은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을 그리워했다. 평생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남동생과 민간 차원에서 1994년 재회했다. 생사조차 모르고 살던 때와 위안의 정도가 달랐다.
‘한 번만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마음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지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커지기 마련이다. 이번에 상봉한 이산가족도 계속 북에 있는 가족이 눈에 밟힐 것이다. 이는 천륜이다. 내 경우 당시 만난 남동생은 먼저 죽고 지금은 북에 있는 여동생과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 여동생과 상설 면회소에서 자유롭게 만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헛된 희망은 접은 지 오래다. 궁극적으로는 ‘상설 면회’라는 ‘꿈’에 다가가며 ‘생사 확인-서신 교환-화상 상봉’과 같은 현실적인 접근부터 해야 한다. 남북 이산가족을 잇는 창구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산가족 문제는 인도주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지구상의 어떤 가족이 이런 생이별을 겪고 손 한 번 잡는 데 수십 년이 걸리겠는가. 가족은 삶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일상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산가족 상봉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소규모 일회성으로 이뤄지는 상봉이 아니라 수시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살아서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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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구섭│남북이산가족협의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