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또는 ‘천연’이라는 말은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옷감의 경우 나일론보다 천연섬유를 더 좋아합니다. 먹거리는 더합니다. 하다못해 광어도 자연산은 훨씬 비싸죠. 화학비료를 뿌려서 키운 농작물보다는 유기농으로 키운 것을 더 좋아하고요. 반대로 ‘화학’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화학물질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우리 몸의 세포 자체가 복잡한 화학 반응이 무수히 일어나는 정교한 화학공장이니까요.
요즘 와인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와인의 효능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화학물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폴리페놀입니다. 폴리페놀은 포도뿐만 아니라 여러 식물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화학물질로 그 종류가 4000가지쯤 됩니다. 포도의 안토시아닌, 커피의 클로로겐산, 메밀의 루틴, 콩의 이소플라본, 차의 카테킨이 모두 폴리페놀입니다. 모두 식품의 좋은 효능을 얘기할 때 거론되는 화학물질들이죠.
폴리페놀이 좋은 효과를 내는 이유는 항산화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산소와 결합하는 것을 막아준다는 뜻입니다. 산소는 의외로 많은 경우에 독으로 작용하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철판에 산소가 결합되면 녹이 슬어 부서지죠. 유전자에 나쁜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 몸에 산소가 필요한 이유는 마치 양초를 태우듯이 우리 몸의 영양분을 태우기 위해서입니다. 나머지 경우에는 산소가 안 좋은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폴리페놀 같은 항산화물질이 몸에 좋은 것이지요.
폴리페놀은 사과에도 있습니다. 사과를 깎아놓고 가만히 두면 갈색으로 변합니다. 이걸 ‘갈변’이라고 하지요. 항산화물질인 폴리페놀이 오히려 산화되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갈색으로 변한 사과는 먹음직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몇 가지 꾀를 냈습니다. 간단한 방법은 산소와 사과가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사과를 공기 차단력이 좋은 그릇에 보관하거나 주방 랩으로 싸놓습니다. 폴리페놀 산화효소가 작용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사과를 끓는 물에 살짝 데칩니다. 폴리페놀을 산화시키는 단백질 효소를 망가뜨리는 것이지요. 식초나 소금물에 담가두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갈변을 막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지만 제 어머니는 이 방법을 한 번도 쓰신 적이 없습니다. 귀찮기 때문이죠. 어쩔 수 없이 깎아놓은 사과는 한 번에 다 먹어치우는 게 우리 집 방식이 되었습니다. 뭐, 큰일은 아닙니다. 깎은 후 먹지 않고 남기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그런데 농산물 가운데는 수확 후 시간이 지나면 껍질을 벗기지 않아도 갈변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많습니다. 재배가 쉽지 않고 가격도 비싼 버섯이 갈변현상이 일어나면 농부의 입장에서는 매우 속상한 일이지요.
과학자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갈변은 폴리페놀을 산화시키는 단백질, 즉 갈변 효소 때문에 일어나니까 이 갈변 효소가 아예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한 가지 단백질 효소만 생기지 않게 유전자를 조작하겠습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유전자 가위(CRISPR; 크리스퍼) 기술이죠. 유전자 가위로 갈변 효소를 작동하지 못하게 합니다. 유전자를 침묵시키는 기술이지요.
유전자 조작 또는 유전자 변형 식품을 ‘GM 식품’ 또는 ‘GMO’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농산물은 1만 년 전에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농부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육종을 통해 만들어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옥수수 가운데 더 크고 맛이 좋은 것을 골라 다음 해 농사지을 때 씨앗으로 사용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옥수수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다른 품종을 교배해서 더 좋은 형질을 가진 개체를 골라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씨 없는 수박, 방울토마토, 호박고구마, 금싸라기참외 같은 것들이 만들어졌죠. 그 어느 것 하나 자연 그대로인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유전자가 도입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육종에서는 교배가 가능한 종의 유전자만 도입되지만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GMO는 교배가 불가능한 종의 유전자도 도입되었습니다. 분명히 육종과 GMO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GMO 식품이 무작정 위험한 것만은 아닙니다. 차분히 생각해보죠.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GMO는 콩과 옥수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콩과 옥수수를 통째로 먹지는 않습니다. 콩에서 기름을 짜내고 옥수수에서는 녹말을 얻을 뿐이죠. 유전자 조작은 DNA에서 일어나고 조작의 산물은 단백질입니다. GMO 식물에 들어 있는 물과 non-GMO 식물에 들어 있는 물이 다를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물은 그냥 ‘H2O’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GMO 콩에서 나온 기름과 non-GMO 콩에서 나온 기름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고 GMO 옥수수에서 나온 녹말과 non-GMO 옥수수에서 나온 녹말 사이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녹말이 다 같은 녹말이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화학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그와 상관없이 안심하고 선택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GMO 완전표시제를 요구합니다. GMO 콩으로 만든 식용유에는 GMO 표시를 하자는 것이지요. 마트 선반에 놓인 식용유 가운데 소비자들은 어떤 식용유를 고를까요?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non-GMO 식용유를 선택할 것입니다. 생산자는 문제가 없습니다. non-GMO 콩으로 식용유를 생산하면 되니까요. 생산자는 별다른 손해가 없습니다. 단지 소비자들이 비싼 식용유를 구입할 뿐입니다.
GMO 식품은 1996년에 시작되었지만 사실 그동안 성과는 거의 없습니다. 식물에는 보통 3만~10만 개의 유전자가 있는데 외부 유전자를 고작 한두 개 주입하는 기술이니까요. 비용만 많이 들었습니다.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서 안전성을 검사하고 홍보했지만 소비자의 호감도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전자 가위 기술은 다른 시대를 열었습니다. 과거에는 유전자 하나를 바꾸는 데 몇 달, 몇 년이 걸리던 일이 이젠 며칠이면 될 테니까요.
육종과 GMO는 외부 유전자가 들어갔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같습니다. 그렇다 해도 GMO는 여전히 환영받지 못하고 있지요. GMO는 21세기의 지동설 같은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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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정모는 서울시립과학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생화학을 전공하고 대학 교수를 거쳐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을 지냈다. <250만분의 1>,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 <내 방에서 콩나물 농사 짓기> 등 읽기 편하고 재미있는 과학도서와 에세이 등 60여 권의 저서를 냈고 인기 강연자이자 칼럼니스트로도 맹활약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