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싱가포르를 방문해 한·아세안 정상회의를 가졌다. 매년 이맘때면 아세안에서는 한·아세안 정상회의, 아세안+3 정상회의 그리고 동아시아정상회의(EAS)가 동시에 열려 대통령은 분초를 다투며 정상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이번에는 3개의 회의 외에도 라오스, 러시아 등과 양자 정상회담을 열어 협력을 다짐하기도 했다. 아세안+3 정상회의는 아세안 10개국과 한중일이 참석하는 다자 회의체로 동아시아 정치경제 질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하다. 아세안+3 회의는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출범했는데, 그 당시 출범 과정에서 우리나라 김대중 대통령의 노고가 컸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주 의미가 있는 회의체다. 또 EAS는 아세안+3 국가 외에 미국, 러시아, 인도 등이 참석하기 때문에 동아시아를 벗어나 세계 차원의 정치질서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중요하다.
문 대통령의 이번 싱가포르 방문의 꽃은 한·아세안 정상회의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제19차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아세안을 대상으로 천명한 신남방정책이 1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신남방정책은 아세안, 인도 등과 협력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특히 아세안은 우리 수출의 16% 이상을 흡수하는, 미국이나 EU보다 훨씬 큰 시장이고 우리 기업은 베트남을 중심으로 아세안에 대거 진출해 있다. 연간 700만 명 이상의 우리 관광객이 아세안을 방문하고 200만 명 이상의 아세안 관광객이 한국을 방문한다. 신남방정책은 남북 화해의 시대를 발판으로 신북방정책과 상호 호응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의 기초가 될 것으로 우리 정부는 생각하고 있다.
한·아세안 교역액 1600억 달러
아세안과의 경제협력은 무역, 투자, 인적교류 등 전반에서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실제로 아세안과의 교역은 중국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올해 16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중국과의 격차도 줄어들고 있다. 또한 수년 전부터 대아세안 투자는 대중국 투자를 웃돌고 있다. 투자가 늘어나면서 우리는 현재 아세안에서 400억 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거두고 있다. 아세안과의 경제협력의 핵심은 현재 상태를 좀 더 안정적으로 유지해나가는 관리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 대통령의 신남방정책은 경제협력 중심의 중상주의적 정책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연계, 평화의 동반자,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미래의 공동체를 창출하는 정책이다.
우리의 신남방정책에 대해 아세안은 지난 1년 동안 의구심을 버리지 못했다. 신남방정책이 과거 우리 정부의 대아세안 정책과 어떤 차별점이 있는지, 상생번영의 의지가 정말로 있는지, 그리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지속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의심했다. 신남방정책을 둘러싼 국내 시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부 각 부처는 신남방정책의 실천 방안을 마련하기에 분주하지만 그들이 마련한 방안은 결국 경제적 진출 방안이 중심이다. 기업 역시 신남방정책으로 시장 개척이나 투자 진출에 어떤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것인지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런 가운데 문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의에서 신남방정책이 추구하는 원칙을 다시 한 번 설명하고 향후에도 그 원칙을 따를 것임을 분명히 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사람 중심의 평화와 번영의 공동체를 아세안과 함께 만들겠다는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신남방정책은 아세안과 함께 번영하겠다는 한국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약속에 대해 아세안 측도 화답했다. 양측은 내년도 한·아세안 대화 관계 30주년 기념 정상회의를 한국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동시에 이 회의에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초청을 추진하기로 했다. 김 위원장 초청을 제안한 쪽은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었는데, 그는 한국과 북한이 함께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하면 그 의미가 더 살아날 것이라고 평가하고 이러한 노력이 가시화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이에 한반도의 평화 증진을 위해 아세안 국가들과 계속 협의하겠다고 답했다. 신남방정책의 중요한 지주인 평화에 대해 한 발짝 더 나아가기로 한 것이다.
또한 문 대통령은 내년도 한·아세안 협력기금을 2배로 늘리고, 아세안 지역에 대한 무상원조 규모도 2배 이상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한국과 아세안의 7억 명의 국민이 함께 잘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선언했다. 과연 상생번영의 의지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아세안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내용이다. 사실 아세안 10개국은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지만 경제 발전 격차가 상당히 크다. 싱가포르같이 1인당 소득이 5만 달러를 상회하는 선진국이 있는가 하면 아직 2000달러 수준에 머문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와 같은 최빈국도 있다. 또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등은 20여 년 이상을 중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아세안의 중진국이나 최저개발국들은 지금 혁신 역량이 필요하고 우리는 이들과 협력해 이들의 발전을 도울 수 있다. 그 첫걸음이 협력기금의 증액과 무상원조의 확대로 나타난 것이다.
장기적 친구 아세안과 동반·포용 성장
이번 정상회의의 내용은 국내에 미치는 의의도 크다. 아세안을 보는 우리 국민의 시각은 여전히 우리 기업이 진출하고 수출하는 지역, 한류가 활발히 수용되는 시장, 저렴한 관광지, 외국인 노동력 또는 외국인 신부 등으로 한정되어 있다. 신남방정책도 여전히 우리 기업의 시장 진출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한다. 청와대의 인식도 국민과 다르지 않다. 청와대의 ‘11시 30분 청와대입니다’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신남방정책의 1년의 성과에 대해서 베트남에서 한국 상품의 인기가 높고, 신남방 지역에서 건설 수주가 큰 폭으로 증가했으며, 한류가 확산되고 있고, 베트남 등 아세안 유학생이 늘어났으며, 해양수산부에서는 아세안의 항만 인프라 진출 기회를 모색한다고 경제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청와대도 국민들의 신남방정책에 대한 기대와 동떨어져 정책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문 대통령이 천명한 바와 같이 아세안과 같이 미래를 개척해나가기 위해서는 신남방정책은 단순한 경제협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아세안과 동반성장·포용성장을 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친구를 만들자는 것이다. 신남방정책이 장기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세안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이 전제되어야 한다. 정부는 국민들보다 한 발짝 앞서서 가야 한다. 멀리 떨어져도 안 되지만 장기적 관점으로 한국과 아세안을 봐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처한 환경이 과거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패권 교체는 필연적으로 정치, 경제적 갈등을 야기하고 이는 향후 장기간 우리의 경제와 외교를 불확실성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또 국내에서는 노령화로 인한 복지 수요의 증가, 중국의 추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급속한 산업구조의 변동과 고용 창출 능력의 감퇴 등 경제적 역동성의 약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패권을 추구하지 않고 동일한 경제적 체제를 가진 아세안이란 친구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문 대통령은 아세안과의 정상회의에서 한국과 아세안 협력의 장기적 관점을 유지해나가야 함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우리를 위해서나 아세안을 위해서나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박번순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