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 말하는 사람(화자)과 듣는 사람(청자)일 것이다. 말이란, 똑같은 말이라도 내가 화자일 때와 청자일 때 아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분명히 나는 이런 뜻으로 말했는데 듣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보통 이런 상황에 처하면 방어 기제를 먼저 발동한다. 그러고는 ‘내 말은 그게 아니라~’는 변명을 늘어놓기에 바쁘다. 그럼 그 변명을 들은 상대방도 당황하며 방어 기제를 발동해 맞대응한다. 양측에서 방어 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서로의 말은 평행선을 달린다. 소통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화자와 청자가 평행선을 달리지 않으려면 둘 중 한 사람은 각도를 변경해야 한다. 조금만 각도를 변경해도 언젠가 둘은 한 점에서 만날 수 있다. 각도를 크게 틀면 틀수록 둘은 더 빨리 만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각도를 크게 트는 것보다 둘이 함께 서로의 방향으로 조금씩 각도를 트는 것이 훨씬 더 빨리 한 점에서 만날 수 있다.
결국 ‘소통’이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일, 또는 상대방의 방향으로 각도를 틀어 서로 한 점으로 수렴해가는 과정이다. 화자와 청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또는 서로의 방향으로 각도를 틀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가 말을 하는 이유는 내 말이 상대방에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상대가 들을 수 있도록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듣는 사람의 감수성으로 말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말하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의 말에 민감하지 않지만 듣는 사람은 대체로 타인의 말에 아주 민감하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상황 안에서 타인의 말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상황과 관련된 부분에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화자와 청자의 언어 민감도 차이, 즉 언어 감수성 차이가 생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통을 위해서는 화자와 청자 사이의 이러한 언어 민감도 차이, 즉 언어 감수성 차이를 좁힐 수 있어야 한다. 화자와 청자 사이의 언어 감수성 차이는 ‘성찰적 말하기’와 ‘배려의 듣기’를 통해 좁혀진다. 성찰적 말하기란 말을 할 때 듣는 사람의 감수성을 가지는 것을, 배려의 듣기란 들을 때 말하는 사람의 감수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성찰적 말하기와 배려의 듣기가 가능하려면 ‘언어 감수성’이 높아야 함은 물론이다. 언어 감수성이 높다는 것은 언어에 대한 민감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언어 감수성이 높아지면 타인과의 소통에서 타인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갖는다. 그만큼 성숙한 소통의 상황이 가능해진다.
성숙한 소통 상황이 가능해지면 서로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용인할 수 있게 된다. 성숙한 소통 환경이 성숙한 민주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숙한 민주사회는 성숙한 소통 상황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발전한다.
기본적으로 민주사회는 서로 다른 생각이 서로 다른 목소리에 담겨 충돌하는 시끄러운 사회다. 그래서 민주시민은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목소리에 담을 수 있어야 하고, 타인의 목소리에 담긴 타인의 생각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주인의 자격이 생긴다. 내가 옳은 만큼 상대방도 옳을 수 있고, 상대방이 틀릴 수 있는 만큼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나아가 상대방과 나의 옳은 점들을 모아 함께 더 나은 생각을 만들어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지영 |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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