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얼빈이 머리카락이 길어서 여자아이 같다고 놀림을 받던 날, 그의 아버지는 아들과의 대화를 촬영하기로 결심한다. 아빠가 아이에게 묻는다.
“얼빈, 너는 왜 머리카락을 기르기로 한 거니?”
아이에게서 뜻밖의 얘기가 흘러나온다. 항암치료로 머리가 몽땅 빠진 암환자들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기부하고 싶어서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놀림에 속상해진 아들에게 아빠가 하는 말 역시 내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얼빈, 이건 비밀인데, 실은 아빠도 종종 놀림을 당해!”
아빠의 말이 ‘조언’이나 ‘충고’가 아닌 ‘공감’이라는 사실이 뭉클했다. 이 다정한 아빠의 몸에는 사실 문신이 가득했다. 우락부락한 그의 얼굴은 우리가 ‘좋은 아빠’라고 상상할 만한 이미지와는 영 거리가 멀어 보였다. 몸에 가득한 문신 때문에 사람들에게 종종 놀림을 당했다는 아빠에게 열 살 얼빈이 이렇게 위로한다.
“전 다른 게 좋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건 좋은 거니까요.”
‘프랑스 육아법’이 한참 유행하던 작년과 올해, 관련 서적과 다큐멘터리를 여러 번 봤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들의 머리카락을 일일이 땋아주던 프랑스 엄마였다. 그 엄마 역시 아들에게 묻는다.
“왜 머리를 기르고 싶은 거니?”
아들이 대답한다.
“머리를 발끝까지 한번 길러보고 싶었어요.”
남자아이라면 단정히 머리를 잘라야지, 라고 충고하는 대신 이 엄마 역시 아이의 마음을 알아준다. 버럭 야단을 치지 않으니 이 엄마를 보살이라 불러야 할까.
수없이 많은 책에서,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사랑에 대한 정의를 듣고 배웠다. 그렇게 20대에 내가 생각한 사랑과 30대의 사랑, 40대의 사랑 모두가 비슷한 듯 조금씩 달라졌다. 그건 내 생각이 움직였단 뜻이다. 보지 못했던 사각지대를 보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듣게 된 건 무수한 사랑의 실패를 겪으면서다. 나 역시 편견이나 오해를 수정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나는 확고부동함이 강함과 다른 개념이란 걸 안다.
“남자아이니까 머리를 기르면 안 돼!”라고 말하긴 쉽다(실은 너무 쉬워서 탈이다). 무작정 버티는 아이에게 “고집 부리면 안 돼!”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도 잘 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지금,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지 않는 것.
엉덩이를 때리고 싶지만 때리지 않는 것.
내가 하고 싶고, 심지어 잘 할 수 있는 그 일을 나의 욕구가 아닌 그 사람의 마음을 위해 기다려주는 것 말이다.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데도 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것 이상의 사랑을 본 적이 없다. 지금 내가 아는 최고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이 역시 시간이 흐르면 다시 변할 거라는 거다. 아이만 자라는 게 아니다. 부모도 어른도 아이를 키우며, 커 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함께 자란다.
백영옥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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