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은 암울하다. 세계 10위권을 오가는 경제 강국이며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앞두고 있는데 ‘일을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800만 비정규 노동자부터 자영업자로 포장된 특수고용과 간접고용으로 중간착취에 시달리는 노동자, 영세업체 종사자까지 불안정한 고용과 생활에 내몰린 노동자들은 1600만 노동자 중 2/3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들은 올해 23.6%에 이른다. 중위임금의 2/3 미만을 받는 저임금 노동자 비율도 이와 비슷한 수치다. 한국은 미국, 이스라엘 등과 함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악의 그룹에 속한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몰리는 비율이 청년 취업자의 80%에 육박한다. 다수가 안정된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 현재의 경제활동을 포기하거나 실망실업 상태의 나락을 경험하고 있다. 노인들은 늙어서도 일을 하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이며, 자살률도 빈곤율도 OECD 평균의 세 배에 이른다. 여성 차별은 개선될 기미가 없고 학력과 직종에 따른 차별은 점점 커지고 있다. 경제 양극화의 반영으로 기업 규모별 임금격차도 날로 커지고 있다. 400만 명이 넘는 영세자영업자들은 비정규직과 실업을 오가는 처지로 전락할 위험성이 매우 크다.
최저임금 보장·근로시간 정상화, 상식적 결단
문재인정부가 노동 존중 사회의 기치를 내세운 것은 한편으로 기존의 기업 편향적, 재벌 의존적 성장 전략과 정책 관행에서 벗어난 과감한 선택일 수 있다. 노동의 차별과 불안정 고용이 넘쳐나는 절박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이 선택은 당연한 이치다.
노동자 중 상위임금 계층을 겨냥하는 정책부터 착수한 것이 그동안의 노동개혁이었다. 위를 낮추는 것은 한풀이는 될지언정 아래쪽이 높아지는 건 아니다. 더구나 노동끼리의 하향경주 속에서 자본소득 비중의 증대엔 눈감게 된다. 노동개혁은 노동을 개혁 대상으로 삼는 게 아니라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의 처지를 북돋는 처방을 바로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문재인정부가 최저임금의 획기적 인상과 근로시간제도의 정상화를 추구한 것은 양극화된 사회에서 벗어날 계기를 형성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결단이다.
그런데 문제가 간단치 않게 풀리고 있다. 최저임금을 16.4%로 획기적으로 인상한 데 대한 우려와 비판이 만만치 않게 제기된다. 이전 5년 평균 인상률 7.4%와의 차액을 중소기업에 지원하는 ‘일자리 안정자금’과 함께 사회보험료 지원 확대, 상가 임대료 상한액 9%에서 5%로 인하, 상생지원대책 등이 제시됐는데도 최저임금이 경영위기를 초래한다는 말이 들려온다. 급기야 최저임금 산입범위도 논란이 되고 있다.
꽤 촘촘한 보완책이 마련되었는데도 부담이 된다는 아우성이 그치지 않는 건 다른 데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영업총비용 중 인건비만 조정 가능한 변수로 보는 관행은 인간 노동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로 바꿔야 할 악습이다. 업체의 총비용 중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6.7%이고, 가장 부담이 크다는 음식·숙박업의 비중도 20% 수준이다. 16.4% 오른 최저임금으로 총비용 증가분은 음식업에서도 3.24%이다. 영세업체에는 많아도 5% 정도가 추가 부담일 것이다. 자영업자들이 가장 힘들다고 하는데, 전체 자영업자 약 570만 명 중 고용인이 없어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영업자가 72.5%에 이르며, 영향을 받는 자영업자는 156만 명 수준이다. 나날이 치솟는 임대료와 원청 대기업이나 프랜차이즈 본사의 과도한 비용 전가 횡포, 대기업에 비해 차별적으로 높게 적용받는 카드수수료 부담은 을의 처지인 영세업체가 어찌할 수 없는 고정비용처럼 여겨지는 게 사실이었다. 때문에 정부는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워도 이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했다.
지난 2월 28일 근로기준법 개정에 따라 법정근로시간이 주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어들었다. 이 국면에 휴일 수당 할증률은 배제되었고 탄력제 확대가 거론되는 등 근로시간 단축의 흐름을 거스르는 사안이 뒤섞이고 있다. 게다가 OECD 국가 평균보다 연간 400시간가량 더 일하는 장시간 노동국가이자 무한노동을 허용하는 틈새가 여전하다. 여전히 근로시간 특례업종이 5개 남아있고 5인 미만 사업장에는 근로시간 기준이 적용되지 않지만, 최소한 합리성을 갖춘 노동시간 체제로 이행 중인 과정이다. 노동시간의 정상화라는 확고한 흐름을 공고히 하는 첫걸음이 되기를 기대한다.
고용 감소 없는 실질임금의 향상 가능
최저임금 보장은 저임금 노동자의 소득 개선, 소비 증가, 고용 증가, 경제성장의 선순환 구도가 형성된다는 긍정적 시나리오에 기반을 둔다. 이제까지 모든 연구를 종합해본 결과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 감소를 가져오지 않는다. 반대로 저임금 노동자의 실질임금 증가에는 분명한 효과를 갖는다. 미국 시애틀 식당업의 최저임금은 2010년 시급 8.55달러에서 2015년 11달러와 2016년 13달러로 올라갔는데, 이를 연구한 버클리 대학의 로버트 라이시 교수 등은 ‘고용 감소 없는 실질임금의 향상’을 입증했다.
우리나라가 2020년 최저임금이 시급 1만 원이 되면 국제 기준인 노동자 평균임금의 50% 수준에 근접하게 된다. 갑의 횡포는 건재하고 을들 간의 다툼으로만 비화하지 않도록 정책 설계를 더 분명하게 하면서 최저임금 1만 원 실현이라는 문재인정부의 공약은 차분하고 당당하게 이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1만 원을 계기로 근로시간 단축 방안을 잘 결합시켜 청년실업 해소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실현할 고용 여력을 확보해 다 같이 고르게 일하며, 약자의 처지를 북돋는 진정한 공정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불안정 저임금 계층의 양산과 양극화의 질곡을 벗어나는 사회로의 계기를 또다시 놓쳐서는 안 된다.
현재의 근로시간 단축은 ‘비정상의 정상화’에 지나지 않지만, ‘비정상이 구조화, 관행화’된 사회에서는 그 정상화마저도 지난한 과제라는 걸 씁쓸하게 확인하게 했다. 불평등과 빈곤의 그늘이 짙은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장 과실의 공정한 배분이란 관점을 지향하며, 그 배분을 ‘임금·고용·시간’으로 확장하고 사회적 연대를 확장하기 위한 비용 조달 구조를 구성한다면 정상화의 첫 단계라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고르게 일하고 고르게 대우받는 사회로 확고한 걸음을 계속 내디뎌야 한다.
김성희│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산업노동정책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