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수사원(飮水思源). ‘물을 마실 때 그 물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현재 우리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면서, 민주공화제 체제에서, 독립국가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살게 된 것은 누구 때문이고 언제부터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대한민국임시정부 때문이고, 1919년부터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99주년을 맞으면서 그 근원을 찾아보고자 한다.
우리 민족은 반만년 역사를 유지해오면서 수많은 국가를 세웠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대한제국 등이다. 세운 나라가 망하면 다시 나라를 세우면서 반만년 역사를 유지해왔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립됐다. 그해 3월 1일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하노라”고 한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3·1독립선언의 핵심은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독립국임을 선언한 데 있다. 독립국임을 선언한 후 독립국을 세웠다. 그것이 대한민국이다.
3·1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많은 인사들이 중국 상하이로 모였다. 독립국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4월 10일 저녁 10시, 이들 중 29명이 대표가 돼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먼저 임시의정원을 설립했다. 임시의정원은 국회와 같은 것이다. 곧바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서 가장 먼저 결정한 것은 국호(國號)였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결정됐다. 이어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헌법을 제정, 통과시켰다. 회의를 마친 것은 4월 11일 오전 10시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탄생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로 약칭)다.
임시정부는 1948년 대한민국정부로 이어졌다. 해방 후 1948년 5월 10일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고, 이들이 5월 31일 국회를 개원했다. 제헌국회였다. 여기서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했다. 제헌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한 근거를 밝혀놓았다.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한 것이다. 제헌국회에서 새롭게 국가를 세운 것이 아니라 3·1운동으로 건립한 대한민국을 계승하고 재건했다는 말이다.
<관보>,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표기
임시정부를 그대로 이었다는 것은 연호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연호를 그대로 이어서 사용한 것이 그 증거다. 대한민정부는 1948년 9월 1일 처음으로 <관보>를 발행하면서 발행일자를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이란 연호는 임시정부에서 사용하기 시작했고,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 1945년은 ‘대한민국 27년’이라고 썼다. 연호는 국가가 바뀌면 다르게 쓴다. 같은 국가에서도 황제만 바뀌어도 연호를 달리 쓴다. 대한제국에서 고종이 ‘광무’라고 했지만, 순종황제는 ‘융희’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이 그런 예다.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고, 민주공화제 체제에서 살게 된 것도 임시정부에서 비롯됐다. 임시정부는 국민의 주권을 행사하는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됐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국민이 주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 이름은 대한제국에서 ‘제’를 ‘민’으로 바꾼 것이다. 대한제국은 ‘대한’이란 나라에 황제가 주권을 갖는다는 의미이고, 대한민국은 ‘대한’이란 나라에 국민이 주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민주공화제 체제에서 살게 된 것은 임시정부에서 비롯됐다. 1919년 4월 11일 제정·공포한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했고,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 정부로 유지 운영됐다. 대표적인 사례로 임시의정원과 헌법에 의한 정부 운영을 들 수 있다. 임시의정원은 국민의 대표인 의원들로 구성돼 국회와 같은 역할을 했고,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운영됐다. 또 수립 당시 헌법을 제정 공포한 이래 1944년 4월에 개정한 헌법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헌법을 개정하고, 헌법에 의해 정부를 운영했다.
임시정부의 수립은 한국 민족의 역사를 뒤바꾼 획기적 사건이었다. 한국 민족은 반만년 역사를 유지해오고 있지만,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군주가 주권을 갖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4000년 이상 지속돼오던 군주주권의 역사가 국민주권의 역사로, 또 전제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바뀐 것이다.
군주주권의 역사에서 국민주권의 역사로
우리가 대한민국이란 독립국가를 유지하며 살게 된 것도 임시정부 때문이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했지만,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점령했다. 이들이 한반도를 점령한 것은 일본과 싸워 이긴 대가였다. 미국과 소련은 수많은 청년을 전쟁터로 내보내 일본과 싸웠고, 싸워 이긴 전리품으로 일본이 차지하고 있던 한반도를 점령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한반도를 완전히 차지하거나 오랫동안 통치하지 못하고, 3년 만에 한국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카이로선언 때문이었다.
카이로선언은 1943년 11월 미·영·중 3국 영수(領袖)들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하고, 회담에서 합의한 것을 발표한 것이다. 여기에 “3국은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되게 할 것을 결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일본이 패망하면 한국은 자유 독립을 한다는 것이었다.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자유 독립을 주장하고 관철시킨 것은 중국이었다. 11월 23일 저녁 장제스(蔣介石)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찾아가 저녁을 함께하며, 대만과 만주 등 일본에게 빼앗긴 영토는 중국에 반환되도록 할 것과 한국을 자유 독립해줄 것을 제안했다. 루스벨트는 이에 동의했고, 이를 근거로 ‘한국의 자유 독립’이란 내용이 들어간 초안이 마련됐다.
초안을 검토한 영국은 ‘한국의 자유 독립’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처음에는 ‘한국의 자유 독립’이란 문구를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한다’로 수정할 것을 제의했다. 중국 측에서 이를 반대하자, 영국 측은 수정할 수 없다면 아예 한국과 관련된 내용을 빼버리자고 했다. 중국 측 실무자인 왕충후이(王寵惠)가 이는 장제스와 루스벨트 사이에 합의된 것이라며 반론을 폈고, 결국 처칠이 ‘적절한 시기’라는 조건을 붙여 합의해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한국의 자유 독립’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임시정부는 장제스가 카이로회의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1943년 7월 26일 김구 주석, 조소앙 외무부장, 김규식 선전부장,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 김원봉 부사령 등은 장제스를 찾아갔다. 그들은 한국의 자유 독립을 주장하고 관철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어려운 일이지만 힘써보겠다”고 약속했고, 회의에서 한국의 자유 독립을 관철시켰다. ‘한국의 자유 독립’은 임시정부가 장개석을 움직여서 얻어낸 성과였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카이로선언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정부는 임시정부 수립을 기념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을 제정해놓고, 해마다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올해는 제99주년이 되는 해이고, 내년이면 100주년이 된다.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근원을 생각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면서, 민주공화제 체제에서, 독립국가를 유지하면서 살게 된 것은 임시정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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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준│단국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