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여성 잡지 <신여자>를 창간한 김일엽
3·1운동은 여성의 현실 참여에 있어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3·1운동 이전에도 여성단체와 여성운동이 있었으며 여성의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이 존재했다. 하지만 여성의 현실 참여가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받으며 사회운동으로 부상한 것은 3·1운동 이후의 일이었다. 3·1운동 이후 노동운동, 농민운동, 청년운동 등이 분출하는 가운데 여성운동도 사회운동의 하나로 자리 잡아갔다.
1880년대에 출발한 여성 교육과 1898년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가 벌인 여권운동이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의 남녀평등권과 여성참정권 선포로 제도적 결실을 맺은 가운데, 여성은 3·1운동을 거치면서 당당한 정치적 주체로 자리를 잡았고 이제 여성단체가 주도하는 여성 계몽운동은 전례가 없는 큰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여성 계몽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여성단체로는 차미리사가 주도한 조선여자교육회가 있었다. 3·1운동 직후 배화학당 교사인 차미리사는 종교교회에서 야학을 열어 부인들을 가르쳤다. 1920년에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하고 부인야학강습소를 열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야학 운영과 함께 강연회와 토론회를 열었다. 1920년 4월 12일 종교교회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이 강연회는 여성 스스로 여성 문제를 주제로 개최한 최초의 강연회였다. 5월 1일에는 승동교회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허정숙
‘조선 안 활동-해외 유학’ 주제로 갑론을박
토론회의 주제는 ‘오늘날 조선 여자계의 급선무가 조선에서 활동함이냐 혹은 해외에 유학함이냐’였다. 여성들이 공개 석상에서 갑론을박하며 토론하는 광경 역시 국내에서는 처음이었다. 6월 5일에 개최한 강연회는 몰려드는 청중으로 아수라장이 되면서 중단되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강연회와 토론회에 대한 폭발적 반응에 이를 유료로 돌려 경비를 조달하고자 했다. 냉면 한 그릇이 15전이던 시절인데도 1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온 청중으로 강연회장은 늘 가득 찼다.
1921년 조선여자교육회는 회관을 마련했으나 운영비가 부족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순회강연단을 조직해 모금 운동에 나섰다. 여름휴가를 이용해 전국을 돌며 강연회를 열기로 계획했다. 순회강연단은 음악단 3명, 연사 3명 총 6명으로 구성되었다. 순회강연단은 7월 9일 서울을 떠나 9월 29일 남대문으로 돌아올 때까지 84일 동안 67개 마을을 순회하며 강연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조선여자교육회의 순회강연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성이 주체가 되어 여성의 자유와 권리, 인격을 되찾자고 나선 자발적인 여성 계몽운동이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마르크스 걸 트로이카’로 시대를 풍미한 여성 혁명가 고명자, 주세죽, 허정숙(왼쪽부터). 1925년 늦봄부터 여름께 청계천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한겨레
여성해방을 표방하는 여성운동이 본격화된 것도 3·1운동 이후였다. 여성해방운동의 주역은 ‘모던 걸’이라 불린 신여성이었다. 신여성의 등장은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의 역사적 산물로 등장한 신여성들은 여성을 억압하던 가족제도를 비판하고 자유연애와 자기 의지에 의한 결혼을 주장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극복하고 남녀평등을 추구하는 여성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3월 김일엽이 여성 잡지인 <신여자>를 창간했는데, 이는 신여성에 의한 여성해방운동의 등장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1923년 천도교에서 여성 잡지인 <신여성>을 창간하면서 신여성은 중등학교 정도를 졸업한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들 신여성은 직업과 가정을 양립하거나, 이상적인 배우자를 만나 부부 중심으로 가정생활을 꾸리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즉 신여성에게 여성해방의 첫걸음은 봉건적인 가족제도를 벗어나 남녀 간의 자유연애, 결혼으로 부부 중심의 이상적인 신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아직 사회적으로는 남자와 동등한 사회인으로서 더불어 활동하고 평등한 의무를 지는 여성상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1923년 천도교에서 여성 잡지인 <신여성>을 창간하면서 신여성은 중등학교 정도를 졸업한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사진은 천도교 중앙대교당
‘계급의식 가진 무산여성’ 내세워
사회주의 여성운동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종래의 신여성 운동은 봉건적인 여성이 삶의 부분적인 변화에 만족하며 그저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든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곧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논리 위에 새로운 여성해방운동이 전개되었음을 의미했다. 기생 출신으로 도쿄에 유학하고 여자 유학생으로 조직된 사회주의 여성단체 삼월회의 간부로 활약했던 정칠성은 ‘신여성이란 구제도의 불합리한 환경을 부인하는 강렬한 계급의식을 가진 무산여성으로,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려는 정열이 있는 새 여성’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신여성에 대한 사회주의식 해석으로,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이끌 신여성 세대의 등장을 상징했다. 정칠성에게 여성해방은 첫째, 교육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쌓아 올리는 것이고, 둘째는 그 바탕 위에서 불합리한 구제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강렬한 계급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정칠성은 가정이라는 소(小)보다 사회라는 대(大)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신여성은 무조건적인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신시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문화 현상이었고,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에 따르면 비판 대상이었다. 하지만 신여성의 등장과 함께 여성 인권론과 여성 해방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만은 분명했다.
여성운동 역시 1920년대 초반부터 몰아친 사회주의의 세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기독교계 여성들이 여성운동을 주도하는 가운데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여성들이 여성운동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여성해방을 사회혁명운동과 동일시했다. 1924년 5월에 조직된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회원으로는 20~26세 여성이 가장 많았다. 1925년에 들어와 여성운동에서 사회주의 색채는 더욱 또렷해졌다. 새해 벽두부터 새로운 사회주의 여성운동단체가 생겨났다. 1월에는 조선여성동우회에 참여한 바 있는 허정숙, 주세죽, 김조이 등이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했다. 조선여성동우회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인 박원희도 2월에 30여 명의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를 모아 경성여자청년회를 창립했다.
조선여성동우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은 이듬해인 1926년 12월에 통합해 중앙여자청년동맹을 결성했다. 중앙여자청년동맹의 강령은 ‘첫째, 무산계급의 권리 및 여성해방을 위하여 청년 여자의 단결과 분투를 기한다. 둘째, 청년 여자의 대중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기한다’였다. 1927년 2월 신간회 창립을 시작으로 사회운동 전반에서 민족협동전선운동이 일어났다.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정칠성│ 한겨레
대표적 이론가 허정숙, 무장투쟁 나서
여성운동에서는 사회주의계 여성 운동가들과 여성 계몽운동에 힘쓰던 기독교 여성 지도자들이 함께 1927년 5월 근우회를 조직했다. 근우회는 선언문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은 조선사회 전체를 위하여, 나아가서는 세계 인류 전체를 위하여 분투하게 되는 행동이 되지 아니하면 안 된다’라고 하여 여성해방이 갖는 보편적 가치를 강조했다. 근우회는 전국적인 여성운동단체로 국내외에 걸쳐 60여 개의 지회가 있었다. 지회들은 본부와 연계하면서 지역 사정에 맞는 독자적인 여성운동을 펼쳐나갔다.
근우회는 1929년 학생 주도의 반일 항쟁인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1월 15일 여학생 시위를 조직화하는 데 앞장섰다. 광주학생운동의 여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3월 초까지 이어진 데는 1월 15일 여학생 시위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성운동을 펼쳤던 근우회가 ‘조선사회 전체를 위하여’ 독립운동의 전선에 뛰어든 셈이었다.
허정숙은 근우회 간부로서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를 촉발한 여학생 시위를 배후 지도했다. 그녀는 당시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 활약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허정숙은 여성운동의 이론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런데 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가 광주학생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었듯이 사회주의 여성운동 이론가로 활동하던 허정숙은 1930년대 들어와 결국 독립운동, 그것도 무장투쟁에 투신했다.
대표적인 페미니스트였던 허정숙이 무장투쟁에 나섰듯, 일제 시기 여성운동은 성평등 운동이자 페미니스트 운동으로 독자성을 뿌리내리는 데 실패했다. 여기에는 식민지라는 현실이 가장 큰 제약 조건으로 작동했다. 사회 각 부문 운동이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면에 내세우는 독립운동으로 포섭되는 당시 풍토로부터 여성운동도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김정인_ 춘천교육대 사회과교육과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와 현대 대학사를 연구하며, 주요 저서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대학과 권력> <오늘과 마주한 3·1운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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