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원산총파업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20년 4월 11일 최초의 전국적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가 발족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노동의 신성과 노동자의 존귀성을 강조하면서 ‘민족적, 계급적으로 이중의 압박과 착취의 대상’이면서 ‘박멸과 자멸의 운명밖에 없는 조선의 노동자 농민 대중’의 해방을 선언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조선의 노동자 농민 대중’이란 표현이 흥미롭다. 당시 지식인들은 노동문제의 시각에서 농민 문제를 바라보았다. 소작인을 농업노동자이자 임금노동자로 간주했다. 공장노동자보다 소작인의 숫자가 훨씬 많으니 소작인 문제가 제일 중요한 노동문제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소작인 운동을 노동운동에 포함하면서 소작인 노동자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일제 순사에 의해 지붕 위로 떠밀린 평원 고무공장 노동자. 1931년 5월 평양총파업 때의 모습이다.│한겨레
민족·계급적 이중의 착취 해방 선언
1924년 4월 20일에는 ‘전 조선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단체를 아우르는 전국적 총동맹을 조직하자’는 결의에 따라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조선노농총동맹의 첫 번째 강령으로 ‘우리는 노농 계급을 해방하고 완전한 신사회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함’을 내세웠다.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선노농총동맹을 노동자와 농민의 두 단체로 분리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운동은 어디까지나 성질이 다른 별개의 산업 분야인 이상, 전국적 조직도 별개의 단일한 중앙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1925년 11월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회는 조선농민총동맹과 조선노동총동맹으로 분리할 것을 결정했다. 하지만 1926년 4월 22일에 열고자 한 분립 대회는 경찰의 집회 불허로 무산되었다. 결국 해를 넘겨 1927년 조선노농총동맹은 분립 절차의 합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우편으로 소속 단체에 의사를 묻는 서면투표를 실시했다. 9월 7일 개표 결과 압도적 다수인 226개의 노동단체와 농민단체가 찬성했고 8개 단체는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마침내 조선노농총동맹은 3년여 만에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나뉘었다.
▶1920년대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
1921년 9월 부산에서 5000여 명의 부두노동자가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동일 부문 노동자가 일으킨 최초의 노동쟁의였다. 원인은 임금 인하에 있었다. 먼저 석탄을 나르는 운반노동자 1000여 명이 고용주들에게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 선언서를 보냈다. 고용주들의 답이 없자 노동자들은 파업을 단행했다. 선박과 운송점에서 일하는 운반노동자 2000여 명도 파업에 가담했다. 고용주들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결국 결렬되자 9월 26일 부두노동자 5000여 명이 총파업을 선언하고 운반 작업을 중지했다. 부산항은 완전 마비 상태에 들어갔다. 일본을 오가는 관문인 부산에서 부두노동자가 일으킨 총파업인 만큼 식민지 경제에 미치는 파장은 컸다.
부산부 부윤과 부산상업회의소 서기장이 직접 중재에 나섰다. 여론은 임금 인하로 생존권을 위협받아 일어난 총파업이라는 점에서 동정적이었다. 고용주들이 인근 지역에서 화물을 운반할 노동자를 구했으나 사람들은 파업을 파괴하는 노동은 수치스럽다며 호응하지 않았다. 첫날부터 수십 명의 파업 지도자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는데도 노동자들은 소규모 집회를 열며 파업을 지속했고, 마침내 9월 30일 노사는 임금을 10~15% 인상하는 데 합의했다. 노동자가 파업을 하는 풍경이 낯설던 시절, 물리적 충돌 없이 사실상 노동자의 승리로 끝난 동맹파업은 당시 세간에 큰 화제가 되었다.
▶항일 노동운동가 이재유의 체포를 전한 일제 어용신문 <경성일보>의 호외
1920년대 중반 들어 조직적 파업 늘어
1920년대 중반에 와서는 노동조합이 늘어나면서 조직적인 파업이 증가했고 임금 문제를 포함해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26년 1월 전남 목포에 있는 제유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식물성 기름을 제조하는 제유공장 중에 목포 공장이 전국에서 제일 컸다. 제유노동조합은 조선노농총동맹과 지역 노동단체들의 지원을 받으며 인격적 대우·임금 인상·노동시간 단축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파업에 나섰다. 회사는 새로 노동자를 모집하는 방식으로 파업에 대응하려 했다. 하지만 직공 모집에 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회사가 강경하게 나오자 제유노동조합은 장기전에 대비했다.
목포제유공장 파업이 한 달 넘게 오래가자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여론은 음력설을 넘기면서 타협의 여지가 있을 것을 기대했으나 허사였다. 회사는 더욱 강경하게 경찰의 후원을 받으며 직공 모집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인근 농촌에서 농민 150여 명을 밤에 변장시킨 채 공장으로 데려와 외출도 금지하고 작업을 시켰다. 나아가 제유노동조합 소속 노동자들을 회유했다. 제유노동조합은 3월 초순부터 폭력투쟁으로 맞섰다. 한밤중에 회사가 모집해 몰래 공장에 들여보내려던 노동자들을 습격하고, 결사대를 결성해 공장에 들어가 유리창을 부수고 작업을 중단시켰다. 결국 지도부가 줄줄이 체포되면서 파업도 막을 내렸다. 목포제유공장 파업은 1921년에 일어난 부산 부두노동자의 파업과 양상이 달랐다.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쟁의가 석 달 넘게 이어진 데는 노동조합이라는 조직과 조선노농총동맹과 지역 노동단체와의 연대, 그리고 언론의 주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29년에 일어난 원산 총파업은 원산의 노동연맹체인 원산노동연합회의 주도로 일어났다. 원산 최초의 노동단체는 1921년 3월에 조직된 원산노동회였다. 원산노동회는 원산항에서 부두노동에 종사하는 항만 하역노동자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1925년 10월 원산노동회는 결복·운반·부두·운송·두량·선박·해륙 등 7개 노동조합을 조직할 것을 결의하고 다음 달에 원산노동연합회로 개편했다. 그러자 인쇄·양복·양화·목공·급수부 등의 직공조합도 원산노동연합회에 가입했다.
원산 총파업은 1928년 9월에 있었던 원산 교외의 라이징 선 석유회사 문평제유공장 노동자의 파업에서 시작되었다. 문평제유공장 노동자들은 일본인 감독 고다마가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자 고다마의 파면을 포함한 5개 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20일간 파업했다. 회사는 이에 굴복해 3개월 후에 해결할 것을 약속했다. 3개월의 약속 기간 동안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했고 원산노동연합회에 가입했다. 반면 회사 측은 책임을 회피하며 3개월을 허비했다.
▶1920년대 군산 정미공장. 양복 입은 일본인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들이 가마니 포대를 깔고 앉아 쌀을 고르고 있다.│한겨레
자본가 단체 상업회의소와 정면충돌
1929년 1월에 문평제유노동조합은 재차 파업을 결의했다. 이제부터 지도부는 문평제유노동조합이 아니라 원산노동연합회였다. 원산노동연합회가 나서 파업을 이끌면서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단체는 문평제유회사의 화물을 취급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이에 맞서 원산상업회의소가 원산노동연합회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통고했다. 이때부터 노동자 단체인 원산노동자연합회와 자본가 단체인 원산상업회의소가 정면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1929년 1월 22일 원산노동연합회는 소속 단체의 파업 참여 의사는 각 단체에 일임하되, 다음 날인 23일부터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그날 곧바로 두량노동조합과 해륙노동조합이, 23일에는 결복노동조합, 운반노동조합이, 24일에는 원산중사조합과 원산제면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갔다. 27일에는 양복직공조합이, 28일에는 우차조합과 인쇄직공조합이, 2월 1일에는 양화직공조합이 동조 파업을 단행했다. 2200여 명의 노동자를 회원으로 둔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 대부분이 파업에 참가했던 것이다. 명실상부한 총파업인 셈이었다. 원산 총파업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면서 파업자금이 답지했고 격려 전보와 편지가 쏟아졌다. 각지의 노동조합이나 노동연맹이 파견한 위문단과 조사단도 속속 원산을 찾았다.
경찰의 대응은 한층 강경해졌다. 지속적인 파업에 밑천을 대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소비조합을 압수수색했다.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들도 압수수색했다. 300여 명의 경찰을 동원해 원산노동연합회 회원 가정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식량과 가옥 상태 등을 조사하기도 했다. 끝내는 원산노동연합회 주요 간부들을 체포했다. 2월 중순부터는 파업단의 식량이 떨어졌다. 원산노동연합회 소속 노동자들은 금주·금연은 물론 하루에 2끼를 먹는 절약투쟁을 벌였다. 석 달 가까운 장기투쟁 끝에 마침내 한국인 고용주들이 원산노동연합회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에 원산노동연합회가 노동자 복귀를 명령했고 4월 6일 파업 종결을 선언했다. 원산이라는 지역에서 원산노동연합회라는 노동단체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80일 넘게 뭉쳐 싸운 총파업은 유례없는 경험이었다.
김정인_ 춘천교육대 사회과교육과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와 현대 대학사를 연구하며, 주요 저서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대학과 권력> <오늘과 마주한 3·1운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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