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이후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전국적으로 열린 만세시위 모습│한겨레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만 시위가 일어난 줄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서울이 3·1운동을 잉태한 곳은 맞지만, 이날 서울 말고도 평양·진남포·안주(평안남도), 선천·의주(평안북도), 원산(함경남도) 등 6개 도시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을 제외하고는 모두 북부지방에 자리하는 도시들이다. 3월 1일 이후 만세시위는 보름간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3월 중순 이후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으로 번져 전국화, 일상화되었다. 3·1운동이 서울만이 아니라 북부지방의 6개 도시에서 동시에 일어났고, 북부지방이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이제껏 남북 분단으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서울은 3·1운동을 잉태한 곳이었다.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은 서울에서 3·1운동을 준비하면서도 지방의 종교 지도자들을 아울러 민족대표를 꾸렸다. 불교 지도자들도 가세했다. 경향 각지에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도 일사불란하게 독립시위를 준비했다. 조선총독부는 종교계와 학생들이 분주히 준비한 독립시위를 알아채지 못했다.
▶1919년 3월 1일 이후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전국적으로 열린 만세시위 모습│한겨레
거리 시위 수천 명 조선총독부 길목 집결
3월 1일 새벽 서울 시내에서는 학생들이 뿌린 독립선언서가 발견되었다. 오전에는 덕수궁에서 고종 장례 절차의 하나인 조문을 낭독하는 의식이 치러졌다. 시내는 3월 3일에 거행될 고종 장례식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정오 무렵 학교 교문을 나온 학생들이 탑골공원으로 행진하며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은 태화관에 집결했다. 이때 학생 대표 강기덕 등이 태화관에 찾아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것을 종용했으나 민족대표들은 거절했다.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열었다. 먼저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으나 낭독하지는 않았다. 종로경찰서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할 인력거꾼을 보내고 점심 식사를 하던 중 경찰들이 달려왔다. 이에 한용운이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된 것을 축하하는 연설을 한 다음 다 함께 일어나 독립 만세를 세 번 외쳤다. 이후 자동차 1대로 여러 번에 나누어 타고 남산에 자리한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열었던 시각인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는 200여 명의 학생들이 집결해 있었다. 이때 독립선언서를 갖고 있던 해주 출신의 기독교 지도자인 “아래위에 수염이 있고 머리를 깎은 마르고 흰 얼굴의 30대 초반, 백색 한복을 입은”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독립선언식을 마친 시위대는 탑골공원을 나와 동대문과 종로 방향으로 나눠 행진했다. 탑골공원에서 200여 명으로 출발한 시위대는 오후 내내 서울 시내를 돌면서 수천 명에 이르렀다. 여러 갈래로 나뉘어 만세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는 오후 4시 무렵 본정(오늘날 충무로)으로 속속 집결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남산 자락에 있는 조선총독부였다. 조선총독부는 재빨리 조선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요청해 오후 5시경 본정에 방어선을 치고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연 태화관 터│한겨레
선천-평양-진남포-원산-의주-안주
1919년 3월 1일 정오 평안북도 선천에 자리한 기독교계 신성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들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시위를 벌였다. 천도교인들도 거리에 나와 함께 독립 만세를 불렀다. 평안남도 평양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천도교가 오후 1시에 각각 고종 봉도식을 올리고 시내에서 만나 연합 시위를 벌였다. 평안남도 진남포에서는 오후 2시 신흥감리교회에서 기독교인들과 학생들이 고종 봉도식을 거행한 후 독립선언식을 하고 거리로 나와 만세시위를 벌였다. 천도교인과 노동자들도 시위에 가담해 행진했다. 같은 오후 2시에 함경남도 원산에서는 때마침 장날을 맞아 기독교인과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처럼 1919년 3월 1일 북부지방에 자리하고 있는 선천과 평양에서 먼저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흔히 3·1운동이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서울의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오후 2시만 해도 서울만이 아니라 진남포와 원산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삼일절 노래’ 가사 첫머리는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로 시작된다. 그래서 혹자는 서울에서 정오에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으로 알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선천에서 정오에 시작되었으므로 가사가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이후에도 북부지방의 두 도시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오후 2시 30분에는 평안북도 의주의 서부교회 광장에서 민족대표의 한 사람인 유여대의 지휘 아래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오후 5시에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동예배당의 청년 기독교인들이 거리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황해도 해주에서는 3월 1일에 만세시위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오후 2시 남본정교회에서 독립선언서 봉도식이 거행되었다. 같은 날 경기도 개성에서는 어윤희, 권애라 등 여성 기독교인들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해주와 개성 역시 현재 북한에 속한 도시다.
▶2·8독립선언서│한겨레
모두 철도역 자리해 거침없이 퍼져
3월 1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7개 도시 모두는 철도역이 자리해 독립시위 소식을 빠르게 접하고 전파할 수 있는 장소였다. 덕분에 7개 도시의 만세시위에서 최남선이 작성한 ‘3·1 독립선언서’가 일제히 낭독될 수 있었다. ‘3·1 독립선언서’는 2월 27일 천도교가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인쇄되었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 지도자들은 다음 날인 2월 28일 ‘3·1 독립선언서’를 전국에 배포했다. 평양, 선천, 원산은 서울로부터 직접 전달받았다. 의주에는 3월 1일 당일 독립시위 현장에 독립선언서가 가까스로 전달되었다.
첫날 7개 도시의 만세시위는 종교 간 혹은 종교와 학생 간 연대에 힘입어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연대했고, 종교계와 학생 간의 연대를 기반으로 독립선언식이 준비되었다. 평양에서는 장로교와 감리교, 천도교가 연대해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고 학생들이 가담했다. 진남포에서는 기독교의 주도로 학생은 물론 천도교인과 노동자가 연대했다. 3월 1일 이후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첫날 보여준 연대 시위는 큰 영향을 미쳤다. 종교인과 학생은 물론 농민과 노동자, 이웃과 이웃, 마을과 마을이 연대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사람의 연대, 공간의 연대가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이어졌다.
조선총독부는 예상치 못한 3월 1일 7개 도시의 만세시위에 크게 당황했고 첫날부터 무력을 동원해 탄압했다. 서울, 평양, 선천에서는 군대가 출동했고, 진남포에는 군대가 파견되었다. 첫날부터 희생자도 발생했다. 진남포에서는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선천에서는 군인의 발포로 1명이 희생되었다.
▶시민들이 3·1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한겨레
비폭력 평화시위, 전국 동참 기폭제
조선총독부가 무력으로 대응했지만 3월 1일 7개 도시에 일어난 만세시위는 분명 비폭력 평화시위였다. 흥미로운 건 7개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의 방식이 똑같았다는 사실이다. 시내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부르는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다음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했다. 다만 첫날 서울에 태극기가 등장했다는 기록은 없다. 만세시위는 3·1운동에서 처음 시작된 시위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첫날부터 7개 도시에서 같은 방식의 만세시위가 가능했을까. 이를 알려주는 분명한 자료는 없지만, 서울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3·1운동을 준비하면서 3월 1일 오후 2시라는 일시와 함께 만세시위 방식을 전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1일 7개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다음 날부터 확산되면서 3·1운동을 상징하는 시위 방식이 되었다. 만세시위의 전국화는 3·1운동이 비폭력 평화의 가치를 추구한 독립운동임을 상징한다. 3·1운동 기간 동안 처음부터 폭력시위를 준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만세 행진을 하다가 헌병, 경찰, 군인이 발포하면 이에 항의하면서 폭력화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간디의 말처럼 ‘여성과 어린이가 함께 할 수 있는 직접행동’으로서의 만세시위, 그것은 3·1운동이 시작된 첫날부터 등장해 시위의 전국화, 일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정인_ 춘천교육대 사회과교육과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와 현대 대학사를 연구하며 주요 저서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대학과 권력> <오늘과 마주한 3·1운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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