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한겨레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주 등 7곳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그날 15세의 나이로 평양 시위에 참여한 김산은 선생님에게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들었다.
우리는 단지 독립과 민주주의만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어느 민족이나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리이다. 우리는 무기를 든다거나 폭력을 써서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당한 요구는 거부될 수가 없다(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아리랑>, 동녘, 2005, 87쪽).
이렇게 3·1운동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독립과 민주주의, 즉 국민주권 실현의 요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1일 선포한 대한민국임시헌장에 고스란히 담겼다.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는 다음과 같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1919년 4월의 민주공화제 선포에 덧붙여, 그해 9월에 출범한 통합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법 제2조에는 더욱 명확한 문구로 주권 규정이 들어갔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 인민 전체에 있음.
이후에도 임시정부는 해방 직전까지 여러 차례 개헌을 실시했으나, 결코 민주공화국을 포기하지 않았다. 민주공화국은 독립을 통해 새롭게 세워야 할 나라였다. 또한 민주주의는 독립을 통해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였다.
▶1948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 행사가 열렸다.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은 민주공화국 수립 운동의 산물이었다.│한겨레
가장 풍성하게 제기된 신민주주의
1945년, 마침내 해방이 왔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해방의 광장에 모여들어 만세를 부르고 희망을 노래했다. 민의가 분출하는 광장은 곧 민주주의의 향연장이었다. 저마다 자신이 꿈꿔온 민주주의 세상을 얘기했다. 민주주의를 논하는 곳이면 어디든 사람들이 몰려와 토론했다.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봇물 터지듯 들어선 수많은 정당도 예외 없이 민주주의를 앞세웠다. 민주주의 강좌를 듣고 <민주주의> 잡지를 읽고 민주주의 포스터 그리기 대회에 참가하며 민주주의를 누리고 꿈꾸던 사람들,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하나가 아니었다.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얼굴을 한 민주주의들이 각축을 벌였다.
해방 정국에서 가장 풍성하게 제기된 민주주의는 민족 통합·사회 통합을 지향하던 중도세력의 신민주주의들이었다. 조소앙의 신민주주의, 백남운의 연합성 신민주주의, 배성룡의 조선식 신형민주주의, 안재홍의 신민주주의 등이 독립 후 민주적 국가 건설이 좌 혹은 우 일방의 길을 걷는 것은 민족 분열·사회 분열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는 현실적 전망에서 제기된 민주주의들이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임시정부가 사용했던 하비로 청사(오른쪽)와 지적도│ 국사편찬위원회
민주주의를 통합과 합작의 가치로 보는 신민주주의들은 공통적으로 신국가의 민주주의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련식 민주주의 중 어느 하나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조소앙은 해방 전부터 ‘민중을 우롱하는 자본주의 데모크라시와 무산자 독재를 표방하는 사회주의 데모크라시’ 모두를 경계했다. 배성룡은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련식 민주주의 어느 하나로는 미소 협조와 좌우 협조라는 새로운 시대 상황에 적응할 수 없다고 보았다. 제3의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이러한 인식에는 민족주의적 사고가 강하게 배어 있었다. 백남운은 연합성 신민주주의를 스스로 조선적 민주주의, 즉 민족적 민주주의라 정의했다. 안재홍은 조선 역사에서는 항상 민족 저항이 계급투쟁에 우선했다며 초계급적인 민족국가 건설을 표방했다.
▶1948년 5월에 촬영된 제헌국회의원 기념사진│국가기록원
좌우합작위 안도 제1·2조 똑같아
민주주의 향연이 펼쳐지는 가운데 정치세력들은 저마다 민주주의국가의 토대가 될 헌법안을 내놓았다. 해방되고 이듬해인 1946년 봄에 우익과 좌익에서 헌법안이 나왔다. 우익에서는 먼저 임시정부 내무부장인 신익희의 주도로 1946년 초에 ‘한국헌법’이라는 이름의 헌법안을 내놓았다.
제1조 한국은 민주공화국임.
제2조 한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발함.
뒤를 이어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서 대한민국임시헌법을 내놓았다. 대한민국임시헌법 역시 한국헌법과 국호만 다를 뿐 제1조와 제2조가 동일했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함.
한편 좌익 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는 조선민주공화국 임시약법을 내놓았다. 현재에는 그 내용을 추정하게 하는 시안이 남아 있다. 그에 따르면 제1조와 제3조에 민주공화국과 국민주권이 규정되어 있다.
제1조 조선민주공화국은 조선 민족의 민주주의 통일국가임을 선언함.
제3조 국가의 전 권력은 전 조선 인민에게 속함.
이듬해인 1947년에는 미군정의 주도로 좌우합작위원회의를 중심으로 한 중도세력이 개설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조선임시약헌을 내놓았다. 제1조와 제2조의 내용은 종전의 우익과 좌익이 내놓은 헌법안들과 같았다.
제1조 조선은 민주공화정체임.
제2조 조선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함.
이 무렵에 미소공동위원회가 속개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남북의 정당과 사회단체에 앞으로 수립된 민주적인 임시정부의 구성, 조직, 정강 등에 대한 의견을 줄 것을 요청했다. 우익 연합체인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는 국호로 대한민국을 제시했다. 중간파로서 좌우합작위원회와 미소공위대책각정당사회단체협의회는 고려공화국을 내놓았다. 좌익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북조선노동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주장했다. 국호에 잘 드러나듯 당시는 ‘세칭 보수적 우익은 대한, 자칭 진보적 좌익은 조선, 통칭 회색적 중간측은 고려’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정당이나 사회단체의 이름만 보아도 정치 노선을 알아챌 수 있던 시대였다.
한편 정체와 관련해서는 우익과 중도세력이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립에 입각한 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주장했다. 반면 좌익은 내각을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인민공화국 체제를 제시했다. 결국 한반도에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던 계획은 좌절되었고, 이듬해 남한과 북한에는 각각 민주공화국 정부와 인민공화국 정부가 들어섰다.
▶1942년 10월에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제34차 임시의정원 좌우파 46명│ 한겨레
대한민국 제헌헌법, 임정 그대로 계승
1948년 5·10선거를 거쳐 제헌국회가 탄생했다. 5·10선거는 만 21세 이상의 남녀 모두에게 선거권을 보장한 보통선거였다. 제주도에서 4·3사건이 일어나면서 200개 선거구 중 제주에 위치한 2개 선거구에서는 선거가 치러지지 못했다. 투표율은 95.5%에 달했다.
5월 31일에 문을 연 제헌국회는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고 헌법 제정에 들어갔다. 1948년 7월 17일에 공포한 제헌헌법은 임시정부 헌법의 체제와 내용을 계승했다. 제헌헌법 전문에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고 명시해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 법통성에 입각해 수립되었음을 천명했다. 전문에 이은 제헌헌법 제1조와 제2조는 다음과 같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두 조항은 임시정부의 마지막 개헌으로 1944년에 탄생한 대한민국임시헌장의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 제4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 전체에게 있음’을 계승한 것이었다. 또 해방 이후 헌법안들이 내놓은 민주공화국과 국민주권 조항의 반영물이기도 했다.
1948년 8월 15일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은 제헌헌법이 임시정부의 헌법을 계승했듯, 1919년 임시정부의 민주공화국 선포를 기점으로 해방 이후까지 이어진 민주공화국 수립 운동의 산물이었다.
김정인_ 춘천교육대 사회과교육과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와 현대 대학사를 연구하며, 주요 저서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대학과 권력> <오늘과 마주한 3·1운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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