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정월나혜석기념사업회
“우리는 자기에 의한 자기를 창조할 뿐이다.” 서양 철학자 베르그송은 인간, 그 자신이 인간의 형성자라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파격적 주장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일반화된 논리. 인물의 활동에 있어 시공간적 배경은 시대에 순응하거나 경계의 틀을 넘어서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틀과 경계에 갇혀 있는 조국과 민족 그리고 여성의 현실은 단순한 생존 논리에 저항했다. 또는 붓을 들고 그림을 통해서 시대의 아픔을 달래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화가 나혜석, 그녀는 독립운동가였다.
나혜석(1896~1948)은 역사의 격변기에 태어났다. 1894년 갑오농민운동과 1895년 을미사변으로 촉발된 의병운동, 그리고 주권 수호를 위한 신교육 운동과 민권운동이 전개되는 시기에 우리나라는 국권을 상실했다. 이 시기에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에서 시흥과 용인 군수 등 지방 관료를 했던 부친 나기정과 모친 최시의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개화된 인물로 수원의 기독교 관련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여성 교육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고, 모친은 부인회를 조직하고 교육과 자선 활동을 하며 주위의 신망이 두터웠다. 오빠 나홍석과 나경석은 일본 유학 이후 애국 인재 양성에 뛰어드는데, 그들의 활동은 나혜석의 민족의식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결혼식
평양 송죽비밀결사대 정신 계승
1902년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회에서 파견된 스크랜턴(M.F Scranton) 여사가 경기도 수원에 종로감리교회를 마련하고 초가집 한쪽에 여학생 3명과 함께 삼일소학당을 시작했다. 4년 뒤에는 지역민의 지지와 의연 활동으로 삼일여학당과 삼일남학당이 분리 설립되면서 지역의 근대 교육이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 나혜석의 부친도 있었다. 1910년 6월 나혜석은 삼일여학당에 입학해 과정을 마친 뒤 상급학교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다. 그리고 나혜석은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문화에 이해가 깊었던 오빠 나경석은 나혜석에게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입학을 권유했다. 일본 유학의 기회는 나혜석으로 하여금 여성의 주체의식과 자존감, 민족의 현실을 깨닫게 하고 유학생들과 시대 토론을 통해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에 대한 의지를 표출시켰다. 개화된 집안이었지만 시대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던 한계와 민족의 암울한 현실은 그녀에게 의식의 변화를 글로써 표현하게 했다.
“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인 인형으로 그네의 노리개였네 노라를 놓아라 순순히 놓아주고 높은 장벽을 헐고 깊은 규문을 열고 자유의 대기 중에 노라를 놓아라 나는 사람이라네”
▶화실에서 나혜석
입센의 희곡에서 영감을 받아 쓴 나혜석의 ‘노라’는 1921년 4월 3일 <매일신보>에 게재된 글이다. 신여성, 신교육, 신문물, 여성해방과 불합리한 사회구조, 조국 현실에 자기 의지를 담았던 나혜석. 그 첫걸음은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토로했던 <학지광>과 <여자계>와의 인연에서였다. <학지광>은 조선 유학생이 1914년 창간한 기관지로 1930년 4월 종간될 때까지 조선 유학생의 고민을 담았다. 남녀평등 시대의 여성 지위 변화에 대한 논의가 주요 주제로 다뤄졌다. 이광수·최소월·김억·김형원·이효석·최승구 등도 글을 게재했고, 나혜석도 <이상적 부인> <잡감> 등으로 자기표현을 했다.
<여자계>는 평양 송죽비밀결사대의 정신을 고스란히 계승한 것이었다. 창간 경위는 확인되지 않으나 시작은 숭의여자중학교 잡지부의 <여자계>에서 비롯됐으며 송죽결사대의 전국 지부 설립과 지역 대표로 구성된 이들이 일본 유학을 오면서 그 정신은 되살아날 수 있었다. 1917년 10월 17일 조선여자유학생 임시총회에서 발간이 결정됐는데 편집부장은 김덕성, 부원은 나혜석, 허영숙, 황에스더였다. 조선 여성의 사회적 담론을 다루는 취지로 <여자계>는 계속 발간됐다. 그리고 그들은 1919년 2·8독립선언 당시 일본 도쿄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2·8독립선언 참여 이유로 도쿄 유학생은 감시 대상이 됐는데 나혜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혜석의 ‘무희’
저항·문명·독립 논했던 여성 선각자
1919년 일본 유학생들이 국내 입국한 뒤 5월 초에 나혜석은 경찰 심문을 받고 투옥됐다. 투옥 대상도 일본 유학생은 구분됐는데 나혜석과 김마리아가 주요 인물이었다. 나혜석은 3·1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돼 옥중 투쟁을 이어갔다. 같은 해 8월 5일,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 방면되기까지 나혜석은 저항했다. 1919년 6월 7일 <신한민보>에는 나혜석의 저항 의지를, 1922년 3월 22일 <동아일보>에는 여성 주체의식을 담고 있다.
“왜경 명고옥여자미술학교 졸업생 라혜석 씨와 여자학원 대학부 출신 김마리아 씨 등은 방금 감옥 중에서 무쌍한 수욕을 당하면서 왜넘 검사의 취조를 받되 겁나함이 없이 용감 활발한 태도로 정당한 도리를 들어 항변하매…” <신한민보>
“우리 조선 여자계를 위하여 열심 진력하는 나혜석 여사는 금번 당지 팔번통 태성의원 내에 여자 야학을 설립하고…” <동아일보>
▶나혜석의 ‘자화상’│정월나혜석기념사업회
이후 나혜석의 활동은 예술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활동 곳곳에 독립운동가와의 만남과 인연은 지속된다. 1923년 3월 황옥 경부 사건에 도움을 준 사례와 1927년 12월 9일 약소민족대회 참가, 12월 네덜란드 헤이그 방문 등에서 김마리아, 서재필, 조소앙, 장덕수 등과의 만남은 그녀의 활동이 단순한 해외 유람이 아님을 추측하게 한다. 최초의 서양화가, 이혼 고백서를 발표해 동시대를 산 이들에게 지탄을 받았던 여성. 주목받은 그녀의 삶만큼이나 나혜석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강렬했다. 제한된 시공간의 틀 속에서 저항, 문명, 독립을 논했던 여성 선각자, 나혜석을 발견한다.
심옥주_ 전 부산대 조교수이며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국회인성교육실천포럼 자문위원, 여성독립운동학교 대표다. 제15회 유관순상을 수상했으며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추진위원회 위원, 국가보훈처 사료수집 전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알리다> <윤희순 평전> <윤희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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