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이어지던 사상 최고의 불볕더위가 기세를 꺾으면서 올여름도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이번 여름이 아무리 뜨거웠다고 해도 계절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화합과 평화를 열망하는 민족적 정서와 경제협력을 지향하는 시대의 순리를 역행할 수 없는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4·27 판문점 선언에 이어 최근 광복절 경축사에서 동아시아철도공동체 구상을 밝히면서 남북 간 철도 연결 사업은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 특히 이 공동체는 우리 경제 지평을 북방대륙까지 넓히고 동북아 상생번영의 대동맥이 되어 동아시아 에너지공동체와 경제공동체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는 철도 네트워크로 동아시아를 한데 묶고,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의 가교국가가 되어 동북아의 평화와 동반 성장을 이끈다는 담대한 구상이다. 남북철도사업을 단순한 교통물류 사업이 아닌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를 지향하는 현실적인 대외정책 수단으로 볼 수있다. 과거 제국주의의 산물이며, 식민지 경영의 상징이었던 철도가 유럽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통합해 유럽연합(EU) 결성을 앞당긴 것처럼, 동아시아 철도사업은 유럽-아시아-태평양을 잇는 유라시아 랜드브리지로서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공동체를 촉진하는 신성장 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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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도기술연구원
과거 유럽의 철도 통합과 관련한 협의체 구성은 화차의 공동 이용에서부터 시작됐다. 1921년 국제철도화차연합(RIV)이 설립됐고, 1922년에는 국제철도 시설과 통합 운영을 표준화하고자 국제철도연합(UIC)이 창설됐다. 이후 1952년 EU의 모체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출범했고, 1953년에 창설된 유럽교통장관회의(ECMT)는 유럽의 운송 산업이 발전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특히 1981년 프랑스 고속철 TGV와 1991년 독일 고속철 ICE는 전 유럽을 1만km의 고속철로 네트워킹함으로써 EU를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늘날 교역 1조 달러 시대를 맞은 한국은 미국을 포함해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동북아 국가들과의 수출입 교역액이 전체의 50%를 넘어섰다. 이러한 증가 추세의 교역 물동량과 대비해 남북 및 동아시아 철도 연결 사업을 추진하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 경제권과 북미태평양 경제권을 연계하는 것은 미래 한반도 경쟁력 제고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이 지역은 전 세계의 철도 수요가 가장 집중되는 곳이다. 그만큼 동아시아 통합철도망의 수요와 경제성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전 세계 철도 화물 수요의 경우, 미국 1위, 중국 2위, 러시아, 인도, 일본 순이다. 또한 전 세계 철도여객 수요는 인도 1위, 중국 2위, 일본, 러시아 순이다.
미래학자들은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경쟁은 더 이상 기업 대 기업 또는 국가 대 국가가 아니라 네트워크 대 네트워크의 구도로 전환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유럽-아시아-태평양을 잇는 ‘철의 실크로드’가 연결되면 수송 시간과 비용 절감 등으로 남북 간의 경제협력뿐만 아니라 대륙경제권과의 협력 확대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이렇듯 아·태 가교국가의 실현을 위해 문재인정부는 ‘한반도 신경제 구상’을 제안했다. 이 구상의 핵심 정책인 환동해(環東海) 경제벨트와 환황해(環黃海) 경제벨트의 핵심축이 각각 동해선, 경의선이다. 동해선 축의 환동해경제권은 한반도종단철도(TKR)-시베리아횡단철도(TSR) / 만주횡단철도(TMR)로 연결할 수 있는 남북한의 동해안권과 러시아 극동·중국의 동북지역을 포괄하는 인구 약 1억 5000만 명, GDP 약 2조 달러의 거대 경제권이다. 경의선 축의 환황해경제권은 TKR-중국횡단철도(TCR)로 연결할 수 있는 남북한의 서해안권과 중국의 동부 연안을 포괄하는 인구 약 6억 명, GDP 약 6조 7000억 달러의 거대 경제권이다.
동아시아철도공동체 구상은 첫째 동해선, 경의선을 통해 환동해 경제벨트와 환황해 경제벨트라는 두 개의 작은 톱니바퀴를 움직여서, 둘째 북방의 대륙경제권과 남방의 해양경제권이라는 두 개의 큰 톱니바퀴를 돌리는 것이다. 이는 ▲한국경제의 신성장 동력 창출 ▲북한경제의 성장 및 변화 견인 ▲남북 경제공동체 ▲그에 따른 평화 번영을 동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체로 확산시키는 매우 중요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한반도 신경제 구상과 동아시아철도공동체는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협력 성장을 위해 동아시아 철도 네트워크와 연결되는 아·태 복합물류 인프라를 공유하고, 투자와 이익을 공유하는 초국경적 협력 메커니즘을 선도해야 한다. 초국경 협력 플랫폼으로 국제철도 협력조직과 기구를 활용하는 방안은 별도의 국제기구 설립이 필요 없어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으며, 기존의 인적·물적 인프라를 이용할 수 있는 실현 가능성이 높은 대안이다. 이러한 방안은 국제기구 설립에 필요한 재원 부담을 최소화하며, 동아시아 국가 간 법적 구속력을 유지할 수 있는 합리적인 안으로 초기 동아시아철도협의체 모델로 적합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제철도협력기구(OSJD), UNDP의 광역두만강개발계획(GTI), 유엔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UNESCAP)의 아시아횡단철도(TAR) 등과 같은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의 참여라는 당면 과제도 있다. 유럽교통장관회의(ECMT)의 경우, 최근 미국과 일본이 참여하고 있어 이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철도공동체의 첫 출발인 동아시아철도협의체는 철도 운송과 관련된 시설과 운영 등 모든 현안에 대한 역내 국가 간협의기구여야 한다. 즉, 이 협의체는 국가 간 철도 운송의 양자간·다자간 현안을 동아시아의 공동 이익 측면에서 폭넓게 협의하는 기구가 돼야 한다. 동아시아철도의 시범운송 사업을 추진하고, 동아시아철도운송협정을 마련함으로써 동아시아철도협의체를 완성할 수 있다. 이후 ‘동아시아의 평화·번영 사업’인 동아시아 통합철도망 사업을 발전시켜 동아시아교통장관회의체인 동아시아철도협력기구를 창설하는 것이다. 동아시아 역내 공동 운송시장도 구축한다.
이렇듯 남북 및 북미관계의 획기적인 개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함께 경의선·동해선 철도 연결은 분단된 국토의 연결뿐만 아니라 기존의 남북관계를 한 차원 더 높이고, 새로운 아·태 협력시대를 여는 개혁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오랜 세월 이어져온 대립과 갈등의 역사를 교류와 협력의 역사로 전환하는 ‘동아시아의 평화 번영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남북 철도의 연결로 한반도의 미래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동아시아철도공동체의 선구자로서 강력한 리더십과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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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승│한국철도기술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