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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9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오른쪽) 감독이 <기생충>으로 작품상을 수상하며 환호했다. | 연합
다시 그리고 마침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기적 같은 일을 해냈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위업을 이뤘던 봉준호는 2020년 미국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았다. 수상 장면을 보면서도 믿기 힘들다고 느낄 정도로 비현실적인 성취, 그것을 그는 두 번이나 해낸 것이다. 일단 몇 가지 기록부터 정리해보자.
1929년에 첫 아카데미가 열린 이래 비영어로 제작된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프랑스 영화이면서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더 아티스트>(2011)는 영어 인터타이틀(중요한 장면에만 이해를 돕기 위해 넣는 자막)의 무성영화이며 촬영지가 거의 미국이라 경우가 다르다). 올해 외국어영화상에서 이름이 바뀐 국제장편영화상 수상작이 작품상마저 거머쥔 것도 물론 처음이다. 예술영화를 대표하는 칸의 황금종려상과 미국의 아카데미를 동시에 석권한 영화는 <마티>(1955)에 이어 두 번째다.
<기생충> 칸영화제에 이어 아카데미까지 제패
칸영화제 이후 <기생충> 현상은 곳곳으로 확산되며 1년 내내 화제에 올랐다. 2019년이 끝날 즈음에는 할리우드의 셀러브리티(유명 인사)부터 일반 관객까지 <기생충>에 대한 관심을 표하지 않은 데가 드물었다. 연말에 집계되는 최고의 영화 목록에서 거의 수위를 유지했고, 해를 지나면서 세계를 돌며 온갖 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봉준호와 <기생충>을 불러 상을 안기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 영화 사이트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IMDB)에서 <기생충>의 수상 목록을 확인하면 스크롤바(화면을 상하 또는 좌우로 움직일 때 사용하는 막대)를 아무리 내려도 끝이 안 보인다. 불과 1년 전 뉴스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출품된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최종 후보에 못 올랐다. 수많은 목록에서 최고의 영화로 뽑히던 <버닝>은 이창동의 명성에도 아카데미의 벽을 뚫지 못했다. 한국영화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정도는 욕심낼 만한데 그게 쉽지 않았다. 이웃 일본의 영화가 외국어영화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게 수십 년 전인데, 한국영화는 후보에도 진출하지 못했다. <기생충>이 칸의 정상에 오르자 이번에는 외국어영화상을 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무르익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뛰어넘으며 작품상으로 점프했으니 기적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언어·지역·문화의 벽을 허문 한국영화의 힘
<기생충>의 아카데미 진출을 놓고 본격적인 화젯거리가 오갈 즈음, 봉준호는 미국의 한 매체와 인터뷰하다 ‘로컬’이라는 표현을 썼다. 미국 아카데미는 국제영화제가 아닌 로컬(지역 시상식)의 성격을 띤다는 뜻이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아카데미는 수많은 나라의 영화들이 모여 축제처럼 겨루는 영화제가 아니라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가 주관하는 시상식일 뿐이다. 그간의 역사를 보면 예술로서 영화보다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을 대표하는 성격이 더 강하다. 그런 성격 탓에 수상을 거부하는 사례가 있기도 했지만, 아카데미 수상의 영예가 실추된 적은 없다. 영예는 상의 권위에서 나온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카데미에서 수상하기를 꿈꾼다. 한 지역을 대표하는 시상식이지만 영화인에게 영예로움을 안겨주고 스스로는 권위를 잃지 않는다. 그 결과, 아카데미는 미국이라는 지역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지위에 오른다.
권위를 유지하게 만드는 첫 번째 요인은 꿈의 공장으로서 할리우드가 지닌 힘이다. 영화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만들어진다. 그러나 할리우드처럼 꿈을 상징하는 곳, 영화를 만드는 곳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공간은 없다. 할리우드로 통칭되는 미국 영화산업이 1년에 한 번 결산하는 자리가 아카데미다. 유명 스타와 감독들을 중심에 배치한 시상식장은 자부심과 화려함으로 넘쳐흐른다. 두 번째 요인은 할리우드 집중화 현상이다. 몇몇 특수한 나라를 제외하면 세계의 극장은 할리우드 영화로 채워진다. 관객이 할리우드 영화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다. 자연스레 할리우드식으로 생각하고 생활하는 법이 관객의 머릿속에 저장된다. 단일 산업이 전 지구를 장악한 지 1세기가 가까운 지금,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 영화와 다른 개념이다. 그러므로 아카데미 수상은 미국이라는 특정 나라를 지나 전 세계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음을 의미한다. 그게 비록 착각일지라도 거대한 매혹 덩어리임을 어찌 부정하겠나.
92년 역사 아카데미에 파란을 일으키다
미국의 보수적인 색채에서 탈피하지 못하던 아카데미는 사회정치적 측면에서 공격을 받게 되었다. 단순하게 말해 아카데미는 ‘백인 남자’의 시선에 맞춰 운영돼왔다. 20세기 중반까지 할리우드는 유럽의 뛰어난 영화인을 받아들여 성장의 기반을 닦았다. 애초 배타적인 곳은 아니었다는 말인데, 그것도 백인 남자에게만 국한된다. 백인이 아닌 인종, 그리고 남성이 아닌 여성은 무대에서 외면받은 게 아카데미의 역사다. 그나마 제작진에게 주는 상은 상대적으로 문을 열어뒀지만, 주요 부문(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은 철저하게 폐쇄적이었다. 시드니 포이티어가 1964년에 남우주연상을 받은 뒤, 21세기가 되어서야 할리 베리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여성 감독과 흑인 감독의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건 공히 지난 10년 안의 일이다. 그렇게 느린 변화만 거듭해온 아카데미는 비판에 직면해 근래 인상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변화를 요약하자면 ‘백인 이외의 인종, 여성, 소수자 등 그간 소외받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고 그들의 힘으로 만든 영화’가 아카데미의 후보와 수상작 사이에서 눈에 띄게 되었다. 시대의 흐름에 대한 형식적 대응에 그친다는 반응도 없지 않으나, 변화란 그렇게 발을 떼는 법이다. 그런 흐름을 대표하는 작품이 2017년에 작품상을 받은 <문라이트>(2016)다. 흑인 감독이 연출했고, 잘 알려지지 않은 흑인 배우들이 출연한 데다 크지 않은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작품이다. 이런 흐름의 정점에 <기생충>이 위치한다. <기생충>은, 자신들의 변화에 방점을 찍을 작품이 필요한 아카데미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든 발견이었고, 아카데미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용기를 보여줬다. <기생충>이 시대 상황에 따라 등장했을 뿐이라고 곡해할 필요는 없다. 기회에는 자격이 요구된다. 필요에 꼭 들어맞을 만큼 충분한 자격을 갖춘 영화가 <기생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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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생충> 촬영 현장의 봉준호 감독
하나의 언어가 된 ‘봉준호 장르’
<기생충>의 폭발력은 양면성에서 기인한다. 봉준호 영화의 위대함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그것도 완벽하게 지녔다는 데 있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부터 <기생충>에 이르는 봉준호의 영화는 일관성을 유지한다. 감독으로서 인간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치밀한 연출력을 지닌 그는 사회적 관심과 스릴러의 형식을 결합하는 데 흐트러짐이 없다.
뛰어난 창작자의 자질은 대중성을 얻으면서 더욱 빛을 발휘한다. 관객은 그의 영화를 보며 심각한 고민만 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감정을 경험한다. 이야기가 재미있으니 따라가기가 심심하지 않고, 때때로 웃고 놀라게 하니 더 바랄 게 없다. 신기하게도, 한국인에게만 통할 줄 알았던 한국영화가 낯선 모습의 외국인에게도 어김없이 통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외국인들이 입을 모아 흥미진진한 영화라고 말하는 모습을 수없이 볼 수 있다.
<기생충>의 미국 내 수입은 3500만 달러(약 413억 8750만 원)를 넘겼으며 국제적으로는 1억 6500만 달러(약 1965억 원)가 넘는 흥행 수입을 거뒀다. 아카데미의 수상으로 흥행 성적은 크게 상승할 전망이다. 아카데미 감독상의 수상 소감에서 봉준호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글을 인용해 ‘개인적이면서 창조적인 작업’을 언급했다. 그는 개인적인 작업을 통해 영화라는 국제 언어를 완성한 셈이다.
어떤 사건은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은 비단 한국영화만의 영광이 아닌, 세계 영화사에 발자취를 남길 엄청난 사건이다. 1950년대 일본 영화계에선 그런 일이 있었다. 후배 구로사와 아키라가 <라쇼몽>(1951)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아카데미에서 외국어영화상(당시에는 명예외국어영화상)을 받자, 미조구치 겐지는 이에 힘을 얻어 <우게쓰 이야기>(1953)와 <산쇼다유>(1954)로 연거푸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을 받았다. 지속적인 도전으로 일본 영화가 아카데미의 외국어영화상을 여러 차례 수상하면서 일본 영화를 포함한 아시아 영화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2020년 2월 9일, 그동안 아카데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나라에서 만든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세계 영화의 중심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대단한 작품이 한국영화에서 나온 거다. 사실, 이 영화가 지닌 매력적인 부분은 다 설명하기가 힘들다. 보는 사람들을 모두 끌어들이고 마는 매력, 그 힘으로 세상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이 허물어지는 상상을 해본다. 할리우드의 심장을 관통한 쾌거가 어떤 여파로 이어질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용철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