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청주 5층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에 전시된 조문기 작가의 작품.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방 눈을 찌르며 괴롭힌다.
힘껏 앞으로 뻗은 두 팔은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나 있다. 다섯 손가락은 최대한 벌려 무언가 잡으려고 애쓴다. 표정은 없다. 넥타이는 뒤로 휘날린다. 한 발은 땅에 딛고 있지만 다른 한 발은 허공을 향해 뒤로 쭉 뻗어 있다. 몸은 직각으로 굽혀진 상태. 애처롭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에 전시 중인 이소연 작가의 작품. 30~40대 화가의 개성이 넘친다.
매일매일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현대인의, 우리의 자화상이다. 정감이 간다. 구릿빛 철판을 두들기고 구부리고 용접해서 만든 구상 작품이다. 신체를 길게 왜곡했으나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가장의 애환과 비애가 흠뻑 묻어난다. 작품 제목은 ‘미스터 리’, 작가는 구본주. 2003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숨진 ‘영원한 청년 천재 작가’다.
당시 작가는 지인들과 회식 자리 후 귀가하다 짙은 안개 속을 달리던 트럭에 변을 당했다. 작가를 데리러 차를 갖고 나온 아내가 도착한 것은 사고 직후 채 2분도 안 된 시간이었다. 가슴이 진하게 저려온다. 비록 작가는 16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구현하려 했던 이미지는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바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1층 개방 수장고다.
▶3층 개방 수장고에 전시된 사진 작품을 학생들이 감상하고 있다.
전시실인데 전시 형태가 일반적이지 않다. 전시된 공간이 ‘수장고’이기 때문이다. 미술품 창고다. 대부분 미술관 수장고는 극히 폐쇄적인 공간이다. 빛도 없다. 수장고에 갇힌 미술품은 큐레이터에게 간택돼야 간신히 빛을 본다. 미술관의 수많은 미술품은 그런 운명이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 소장된 미술품은 쉽게 얼굴을 볼 수 있다. 수장고 형태로 바로 관객에게 다가서기 때문이다.
▶3층 개방 수장고에 전시된 문이원 작가의 ‘당신의 대안은 무엇입니까?’ 작품 앞에서 학생들이 작품을 유심히 보고 있다.
국내외 최고 작가 작품 줄줄이
10월 8일부터 모두 160점의 조각, 공예 작품이 현재 1층 개방 수장고에 전시 중이다. 세계적인 비디오아트 작가 백남준의 ‘데카르트’도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전자회로 기판이 그대로 드러난 로봇이다. 눈과 입인 3개의 모니터에는 춤추는 발레리나와 머리로 건반을 내리치는 피아니스트의 영상이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수장고 입구에 있는 5개의 불상도 눈길을 끈다. 크기가 다른 불상이 정확히 반으로 잘려 있다. 잘린 불상은 중간에 약간의 틈이 벌어져 있다. 다른 색의 대리석, 화강암, 청동으로 만든 불상 조각의 작품명은 ‘부처의 소리’. 작가 안성금은 작품 설명서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인 부처의 모습을 둘로 갈라서 인간의 정신성에 대한 절망감과 의문, 비인간화하는 우리의 폭력적인 모습을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마당에 설치된 최정화 작가의 ‘민들레’. 쓰고 버린 7000여 개 생활용품을 활용해 ‘재생과 희망’을 표현했다.
9월 27일 금요일 오전, 마침 미술관 야외 수업을 나온 청주의 중학생들이 유심히 둘로 갈라진 불상을 쳐다본다. 표정이 심각해진다. 불상을 둘로 가른 작가의 생각을 읽어내려 애쓴다.
바로 뒤에 있는 프랑스의 세계적 작가 장 뒤뷔페의 ‘집 지키는 개’도 개방 수장고의 전시물을 빛내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개의 형상은 없다. 흑과 백으로 조화를 이룬 대리석의 기묘한 형상을 보며 관람객들은 개를 찾으려 애쓴다.
▶5층 전시실 복도에 전시된 박경진 작가의 ‘엄습#1’. 영화 촬영장 세트를 통해 을씨년스러운 현실을 표현했다.
수장고 중간에는 대형 마트의 진열대처럼 만든 칸막이 공간에 조각품들이 줄줄이 전시되어 있다. 일반 전시실처럼 각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하지만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국내외 최고의 작가들 작품이다.
개방 수장고는 수장고에 들어가 작품을 가까이 볼 수 있어 좋지만 훼손이 우려되기도 한다. 기존 수장고는 작품의 보존을 위해 기본적으로 항온·항습이 유지되는 공간이라 관람객의 출입만으로도 온습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는 개방 수장고에 온습도의 영향을 덜 받는 조각품이나 공예 작품 위주로 배치했다.
▶대형 마트의 진열장처럼 개방 수장고 내부는 일반전시장보다 많은 작품이 전시돼 있다.
벽면·수납장에 작품 빼곡, 한꺼번에 감상
왜 개방 수장고 형태의 전시를 할까? 국내 유일한 전시 형태다. 10월 8일부터 기존 1층 개방 수장고를 확대 개방해 공예 소장품 400여 점을 공개했다. 지난 50여 년간 국립미술관이 수집한 도자, 금속, 유리, 섬유 등 다양한 재료와 형태의 공예 소장품을 직접 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는 2018년 12월 국내 최초로 작품을 보관하는 창고를 일반에 개방하는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애초 이 건물은 담배를 만들던 연초제조창의 일부 공간이었다. 옛 연초제조창은 청주의 대표적 산업시설이자 국내 제1 담배공장이었다. 근로자 2000~3000명이 해마다 담배 100억 개비를 생산했다. 1946년 공장 문을 열어 1999년 문을 닫을 때까지 지역민을 먹여 살렸다. 건물만 24동, 용지 면적은 136만㎡에 이른다. 2004년 공장이 문을 닫은 후 도심 속 흉물로 방치됐다. 철거와 재개발을 놓고 오랫동안 논란이 계속됐다.
▶청주관 1층 개방 수장고에 전시된 구본주 작가의 ‘미스터 리’. 바쁜 일상에 매몰된 현대인의 자화상
청주시는 이 공장을 매입해 2007년 연초제조창 원료공장을 리모델링해 첨단문화산업단지를 조성했다. 청주첨단문화산업진흥재단이 입주하고 80여 개에 이르는 문화 관련 기업이 둥지를 틀었다.
2018년 12월에는 청주관을 오픈했다. 누구나 수장고에 들어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또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보관 중인 작품도 감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3층의 미술은행 개방 수장고에는 150여 점의 여러 장르 미술작품을 전시장 벽면과 수납장에 빼곡히 쌓아 올려 작품을 밀도 있게 감상할 수 있도록 관람객을 유도한다.
이용덕 작가의 ‘Standing 110781’ 작품 앞에서 관람 온 학생들이 포즈를 잡는다. 작품 속 주인공과 비슷한 동작을 취하는 것이다. 음각으로 판 조각이지만 양감이 느껴지며 관람자의 시선에 따라 조각 작품이 움직이는 듯한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작품 앞에 다가서면 어느 샌가 인물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푹 팬 공간만 남아 있다. 신기하다. 작가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이들 역시 만나는 순간에는 실재하는 듯 인지되나 지나쳐버린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 속 인물로 전락한다”고 말한다.
▶국내 최초로 개방 수장고 전시를 하는 의미를 설명하는 이추영 학예연구관
미술품을 보존·처리하는 공간도 활짝 열었다. ‘보이는 보존과학실’에서는 회화·조각 등 갖가지 미술품의 손상된 부분을 과학적으로 복구해 보존하는 과정을 관람객에게 공개하고 있다. 하루 한 번씩 미술품을 보존·복구하는 연구원들의 모습을 유리창을 통해 그대로 볼 수 있다. 마치 수술실의 의사처럼 신중하고 정밀한 작업을 하는 연구원들 모습에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는 야외 벽면에도 미술작품을 설치했다. 정문 위쪽엔 9월 26일부터 코디 최 작가의 대형 설치작품 ‘베네치안 랩소디-허세의 힘’이 배치되어 있다. 이 작품은 2017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출품작이다. 높이가 약 14m에 이르는 거대한 작품은 호랑이, 공작, 용 등의 동물 형상에 네온과 LED 조명이 화려하게 빛을 뿜어낸다.
▶개방 수장고 전시는 관람객들에게 많은 작품을 감상하는 새로운 기회를 준다.
평일 500명, 주말 2000명 발길 북적
작가는 카지노로 유명한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네온 광고판을 모방해 비엔날레라는 권위 있는 예술 행사도 결국엔 유명 작가 발굴과 이를 통한 아트 비즈니스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 풍경과 중첩된다며 현대미술에 드리운 자본주의 논리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한다.
▶1층 개방 수장고에 전시된 안성금 작가의 ‘부처의 소리’
마당에도 몇 개의 미술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초대형 설치작품 ‘민들레’가 눈길을 끈다. 최정화 작가는 민들레 홀씨를 최대 지름 9m, 무게 3.8톤의 거대한 설치미술로 형상화했다. 작가는 시민들에게 기증받은 플라스틱 바구니와 냄비 등 7000여 점의 생활용품으로 마치 연초제조창이 현대미술관으로 재탄생한 것처럼, 폐기된 생활용품이 예술 작품으로 승화해 ‘재생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청주관 외벽에 전시중인 코디 최 작가의 설치작품 ‘베네치안 랩소디-허세의 힘’
이추영 학예연구관은 “이미 해외에서는 30년 전부터 관람객들의 참여를 이끌고 폐쇄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수장고를 개방하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며 “평일에는 500명 이상, 주말에는 2000명 넘는 관람객이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를 찾아 새로운 인기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미술관 수장고가 더는 ‘비밀의 성역’이 아니라 투명하게 공개된 공간이기에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글·사진 이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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