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한글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해부학 교과서인 ‘제중원 <해부학>’을 대중에 처음 소개하는 기획특별전 ‘나는 몸이로소이다-개화기 한글 해부학 이야기’를 7월 19일부터 10월 14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하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제중원 <해부학>’ 전질은 1906년 간행된 초간본으로 3권 전질이 갖춰진 유일본이다. ‘제중원 <해부학>’은 일본 해부학자 이마다 쓰카누(今田束)의 <실용해부학(實用解剖學)>(1888)을 제중원 의학생 김필순(金弼淳)이 우리말로 번역하고 제중원 의학교 교수 올리버 에비슨(魚丕信, Oliver R. Avision)이 교열해 1906년에 펴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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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몸이로소이다- 개화기 한글 해부학 이야기’는 한글을 주제로 한 전시의 기준이 될 만한 메가톤급 전시다. 특히 한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제중원 <해부학>’ 전질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된다. ⓒ국립한글박물관
최초의 한글 의학서를 통해 ‘몸’에 대한 우리말과 문화의 역사를 조명한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아울러 ‘제중원 <해부학>’과 함께 18개 기관 소장 유물 127건 213점을 전면적으로 공개하는 이번 전시는 규모 면에서도 전례가 없다.
전시를 기획한 고은숙 학예연구사는 “최초의 한글 해부학 의학 교과서를 바탕으로 우리 몸에 대한 말과 사고, 세계관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전시”라고 설명했다.
제중원 <해부학> 초간본 전질 최초 공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해부학 교과서가 탄생하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민영익(閔泳翊)을 의료 선교사 알렌이 외과수술로 치료한 일이 결정적이었다. 칼에 찔려 생명이 위독한 민영익의 몸을 열고 꿰매는 외과수술은 당시 조선인들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민영익의 외과수술을 계기로 알렌은 고종에게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했다. 1885년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이 세워지고, 의학생도 양성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에비슨이 김필순과 만나 번역 작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인 의학생에게 보다 쉽고 빠르게 서양 의학을 가르치기 위해 한글로 번역된 의학 교과서의 필요성을 절감한 에비슨이 처음 선택한 책은 헨리 그레이(Henry Gray)의 <해부학(Anatomy of the Human Body)>이었다. 하지만 에비슨이 잠시 고국을 방문한 사이 조수의 죽음과 함께 완성된 원고도 사라졌고, 이후 김필순을 만나 재번역한 원고 역시 불타 없어지는 등 고난을 겪는다. 이후 세 번째로 번역한 책이 바로 이마다의 <실용해부학>이다. 여러 번의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번역하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마침내 최초의 한글 해부학 교과서가 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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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 해례본>부터 <동의보감>, <해부학>,<조선어사전>에 이르기까지 몸의 명칭을 문헌에 나오는 이미지 그대로 시각화했다고 고은숙 학예연구사는 설명했다. ⓒ국립한글박물관
검시 보고서에 나타난 전통의학의 가치관
전시는 모두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 ‘몸의 시대를 열다’에서는 몸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관과 근대 서양 의학의 관점 차이를 비교하고, 2부 ‘몸을 정의하다’에서는 한글 창제 이후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몸을 가리키는 우리말의 변화상을 선보인다. 마지막 3부에서는 최초의 한글 해부학 교과서인 ‘제중원 <해부학>’을 소개하고 한글학적 의의를 살펴본다. 무엇보다 개화기 근대 건축의 공간 특성을 반영한 전시 공간의 연출이 전시의 집중도를 높여준다. 개화기 건축물을 모티브로 문과 창, 등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연출된 공간은 흡사 실제 제중원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해부학을 기초로 하는 서양 의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몸을 치료하는 문제를 넘어 몸에 대한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와 관련된 일이었다. 극과 극에 있는 몸에 대한 동서양의 가치관이 어떻게 다른지 1부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한글로 번역된 조선의 법의학서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寃錄諺解)>다. 언해란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로 몸을 가리키는 다양한 우리말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시신의 몸을 열어보지 않았다. 오로지 겉으로 드러난 몸의 흔적을 조사할 뿐이었다. 당시 자살로 위장된 타살이 제법 있었는데, 부검을 하지 않기 때문에 원래 상처를 찾기 위해 감초물로 상처를 닦아낸다든지 독살을 알아내기 위해 은비녀나 밥알을 이용했다. 시신의 입이나 항문에 밥을 넣었다가 닭에게 먹이고 반응을 보는 식이다.
주목할 만한 자료는 조선시대 살인사건의 검시 보고서인 ‘검안(檢案)’이 있다. 이 보고서는 처음 공개되는 자료로, 1902년 강릉군 내면 운동동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인 ‘이운지 이경화 시신 검시 문안’(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900년 남원군 남생면의 ‘이판술의 육세 아들과 이여광 이군필 이판용 사안’(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이다. 어떻게 사체의 흔적을 살피고 관련자 심문을 통해 사인을 밝히는지 전통적 접근 방식을 잘 보여준다.
해부학이 들어온 이후 몸에 대한 관점이 바뀌고 우리말 몸 이름은 변화를 겪는다. 개화기 새롭게 들어온 한자어 용어에 밀려 이전에 썼던 말이 사라지거나 의미가 바뀌기도 하고, 새롭게 들어온 한자어보다 이전의 고유어 표현이 더 활발하게 쓰이기도 했다. 서양 의학이 몸에 대한 치료방식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음을 신소설 속 표현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해조의 <빈상설>에서는 간교한 첩에게 홀린 주인공의 상태를 “신문학으로 말하면 뇌에 피가 말라 신경이 희미하다 할 만한”이라고 표현했다. 서양 의학의 도입으로 ‘이두박근’, ‘안면근’, ‘복근’, ‘승모근’ 등 근육을 지칭하는 단어가 새롭게 등장한다. 눈, 코, 입, 귀와 관련해서는 특히 이전에 쓰이던 말과 새로운 말이 공존한다. 이전에 없던 ‘홍채’, ‘수정체’ 등이 상식으로 자리 잡았고 ‘안검’과 같은 어려운 말은 기존의 쉬운 표현 ‘눈꺼풀’이 더 활발하게 쓰이는 식이다. 몸속 기관들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간과 쓸개의 관계 특성이 반영된 우리말 ‘간에 붙었다 쓸개 붙었다 한다’, ‘간이 부었다’, ‘간이 콩알만 해졌다’ 등과 위와 비장을 사용하는 ‘비위가 사납다’, ‘비위가 좋다’ 등의 표현도 이전의 전통적인 사고가 반영된 표현이다. ‘부아가 난다’의 ‘부아’는 폐를 가리키던 옛말로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다. ‘애가 탄다’, ‘배알이 골리다’에서 ‘애’와 ‘배알’은 ‘장’의 옛말로 한자어 세력이 커지면서 원래 이름이 쓰이지 못하고 의미가 변한 대표적인 예다. 2부 ‘몸을 정의하다’ 전시는 ‘몸의 기둥, 뼈와 근육’, ‘마음의 집, 심장과 뇌’,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기관’, ‘서로 돕는 몸속 기관’의 네 가지 주제로 구성해 주제별로 몸에 대한 우리말과 문화, 새롭게 생겨나고 사라진 말들을 볼 수 있다.
한글 의학서는 한글사의 중요한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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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검시문안> 강릉군 내면 운동동 치사 남인 이운지 이경화 시신 검시 문안(陵郡邱井面德峴里致死男人朴文七獄事初檢文案) 1902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28.5(세로)x18.0(가로)cm. 조선시대의 검시 보고
서 검안(檢案)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의 흔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2 <해부학(解剖學)> 권1~3 1906년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22.6(세로)×16.0(가로)cm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해부학 교과서이다.
3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錄諺解)> 1796년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31.3(세로)×19.4(가로)cm 살인 사건과 관련된 시시비비를 명백히 밝히기 위한 검시(檢屍) 지침서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최초의 한글 해부학 교과서 ‘제중원 <해부학>’ 3권의 실물을 직접 관람할 수 있는 3부 전시가 이번 기획의 최고 백미다. 1권은 뼈와 관절, 근육, 2권에는 내장기관, 3권에는 혈관과 신경에 관한 내용이 기술돼 있다. 원서에 없는 새로운 지식을 더하기도 하고, 다른 그림으로 교체해 넣기도 하는 등 원서의 체재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주체적으로 수용하고자 한 노력이 돋보인다. 원안이 된 이마다 쓰카누의 <실용해부학>도 전시돼 있어 비교해볼 수 있다. 제중원과 세브란스병원 의학교에서는 <해부학>을 시작으로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약 30여 종의 한글 의학서를 출간했다고 기록돼 있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약물학 상권(무기질)>(1905,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소장)과 <신편화학교과서(무기질)>(1906, 연세대 학술정보원 소장), <병리통론>(1907,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외과총론>(1910, 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소장) 등 14종이다. 각 소장처에 흩어져 있던 서적들이 이번 전시에 처음으로 모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글 의학 교과서의 사용 기간은 몹시 짧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일본어 교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한글 의학 교과서들은 대부분 영어나 일본어 책을 번역한 것이지만, 새로운 개념과 지식을 우리말로 전달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한글사의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당시 만들어진 ‘세포’, ‘신경’ 등의 몸 관련 어휘와 지식은 이제 자연스럽게 우리 생활 속에 뿌리내렸다. 이 전통이 이어졌다면 우리말을 다듬는 작업이 보다 풍성했을 텐데 사실상 맥이 끊겨 안타깝다. 그래서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최초의 한글 해부학 교과서 ‘제중원 <해부학>’을 비롯해 현존하는 14종의 한글 의학서의 한글사적 의미가 남다르다. 한글을 통해 우리말의 역사와 문화, 세계관의 변천사를 훌륭하게 증명한 이번 전시는 한글 전시의 새로운 기준이 된다.
교포·외국인과 한여름 한글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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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씨 예술가 박병철 작가의 캘리그라피를 통해 한글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왼쪽) 여름방학을 이
용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경험 중인 에모리 대학 학생 13명이 한글 파티에 참가했다. ⓒ국립한글박물관
7월 27일, 서울 종로구 서촌의 한 카페에서 한글플래닛이 주최한 한글 파티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한국을 직접 방문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공부하고 체험하는 여름방학 프로그램 연수에 참가한 미국 에모리대학교(Emory University) 재학생들이 대상이었다.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물론 생물학이나 경제학 등 다양한 전공 분야의 학생들이 프로그램에 함께했다. 한글 파티에 한지와 지필묵, 한글 교재 등이 준비돼 있긴 했지만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파티는 한글플래닛의 메인 프로그램인 글씨예술가 박병철 작가(한글플래닛 이사)의 한글 써보기로 시작됐다. 박병철 작가는 깃털, 칫솔, 면봉, 구겨진 종이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학생들의 이름을 캘리그래피로 그림처럼 썼다. 비록 한글을 모르더라도 문자가 주는 아름다운 조형미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한글 써보기의 하이라이트는 하얀 한지 위에 박병철 작가의 주문대로 큰 원을 그리기도 하고, 흡사 나무토막 같은 작대기를 그리기도 한 중국계 여학생의 글씨 쓰기였다. 한지 위의 검은 바탕으로는 무슨 말을 썼는지 유추하기 힘들었다. 박병철 작가가 “검은색 말고 흰 여백을 읽어라”고 힌트를 주는 순간 여기저기서 ‘봄’이라고 말하며 환호했다.
한글플래닛은 한글의 멋과 아름다움을 재미와 놀이, 상상을 통해 널리 알리고 이를 문화콘텐츠로 확산하는 한글문화 글로벌 단체다. 미국 미네소타주 ‘한국의 날’ 행사에서 해외 입양아 가족과 함께 한글을 써보는 봉사활동으로 시작한 한글플래닛은 미국은 물론 국내에도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2015년엔 서울 종로구 골목축제에 초청돼 ‘시민과 함께하는 한글파티’를 열고, 그해 연말에는 경기 포천군 한 포병여단에서 ‘찾아가는 한글 파티’ 행사를 갖기도 했다. 2016년 미국 앨라배마주 오번대학 초청행사에 이어 미네소타주가 정한 ‘한국의 해’ 공식행사로 채택돼 수년째 이어온 ‘한글 파티’의 저변을 더욱 확대해가고 있다.
홍지숙 한글플래닛 대표는 “한글을 어떻게 하면 보다 쉽고 재미있게 알릴까, 같이 놀면서 어렵지 않게 북돋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여기까지 이어지게 됐다”면서 “한국어 이전에 훌륭한 세계유산인 한글이란 문자를 알리고 싶다”고 했다. 이날 파티에서 박병철 작가는 꿈, 희망, 우정, 엄마 등 서정적인 단어로 한글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마음껏 보여줬다.
“한국어는 무척 어렵지만 한글은 너무 예뻐요. 글씨를 쓴다기보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아서 한국과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요.” (김지현, 에모리대학 생물학 2학년)
한글플래닛의 한글 파티는 올해로 5년째다. 파티도 국내외 80여 차례 진행했다. 그리고 수많은 파티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비록 말을 모를지라도 글이 주는 진한 여운에 포착한 한글플래닛의 한글 파티는 누구나 한 번쯤 초대되고 싶은 파티임이 틀림없다.
강은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