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윤흥규(92) 씨는 막걸리 한 병을 비우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니,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20년쯤 됐을까? 언제 신청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다림이 길어지며 만남을 포기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고향과 가족을 생각하면 공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잊고 사는 게 마음 편했다. 그런데 8·15 계기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에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 잊었다고 믿었던 가족 생각이 거짓말처럼 머릿속에 밀려들었다. ‘남동생 원규와 여동생 옥영이가 살아 있을까?’
꼭 70년이 됐다. 고향을 떠난 스물두 살 청년은 아흔두 살 노인이 됐다. ‘일곱 살배기 옥영이도 이제 일흔일곱 살이 됐겠지?’ 윤 씨보다 열다섯 살 어린 막둥이는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그런 동생이 노파가 됐다니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머리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리고 보송보송하던 얼굴에는 주름이 졌겠지, 아버지를 닮았을까, 어머니를 닮았을까?’ 얼굴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대면 당일 이름표를 보고서야 알아볼 가능성이 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벌써 돌아가셨다. 또 다른 동생 원규 씨는 생사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했다. 지금껏 몰랐던 부모님 기일도 알아야 했다. 이제 곧 동생을 만나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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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흥규 씨가 북측에 있는 가족의 생사 의뢰 확인 결과가 담긴 회보서를 보여주고 있다. ⓒC영상미디어
“오래 산 보람이 있네요”
1949년, 해방을 맞은 지 몇 해가 지났지만 세상은 혼란스러웠다. 호기심이 꿈틀댔다. 서울에 가서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보고 싶었다. 윤 씨는 월남을 결심했다. 캄캄한 새벽,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고향 평안북도 정주군을 떠났다. 어머니는 “그동안 건강하게 지내거라”며 꼬옥 안아줬다. 그렇게 모자는 훗날을 기약했다. 3년이면 만날 줄 알았다. 이렇게 평생 못 만날 줄 알았다면 어머니도 아들을 떠나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해 전쟁이 터졌다. 그는 국군 장교로 입대했다. 미군 헌병사령부에 배속된 그는 각종 훈장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피아노를 전공한 아가씨와 가정도 꾸렸다. 결혼할 때 북에 있는 가족들이 많이 생각났다. 결혼 소식을 알릴 방도가 없으니 더욱 애가 탔다. 그럼에도 새로운 가족이 생겨 안도감을 느꼈다. 자녀가 생기지 않았지만 둘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그러던 중 짧은 결혼 생활이 막을 내렸다. 아내가 암에 걸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견딜 수 없었다. 윤 씨는 아내의 뒤를 따르려고 했다. 그때 꿈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머니는 아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길 바라셨다.
이후 참 열심히 살았다. 윤 씨는 한국상담심리학회, 새마을금고 지부 이사장, 대한노인회 지역 고문, 조기축구회장, 산악회장 등등 각종 활동을 이어갔다.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부지런히 살았다. 어느새 90세를 넘겼다.
막상 상봉에 선정되자 윤 씨는 만감이 교차했다. “고향 생각 하나도 안 난다”며 툴툴대면서도 고향을 물으면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덕성동 716번지”라고 주소를 줄줄 읊었다. 동생이 알아볼 수 있도록 젊은 시절 사진도 준비했다. 윤 씨는 아내와 사별한 후 재가하지 않아 북에 있는 가족이 유일한 가족인 셈이다. 이번 방북 길도 유일하게 혼자 오른다.
동생을 만나는 날 입을 정장은 진작 다려뒀다. 산뜻한 흰 셔츠에 맬 넥타이도 골라뒀다. 이발할 때가 한참 지났지만 출발 전날 하려고 참고 있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사진을 멋지게 찍고 싶어서다. 선물은 뭘 준비해야 하나 아직도 고민하고 있지만 무얼 고르든 마음에 찰지 모르겠다.
“주위에서 어떻게 그런 행운이 찾아왔냐고 놀랍니다. 상봉 대상자에서 자꾸 떨어져 기분만 상하니까 거의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제 나이가 아흔 살이 넘었으니 동생들도 만남을 포기하고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있었으면 함께 기뻐했을 텐데, 동생 만나러 간다고 이것저것 챙겨줬을 거예요. 그래도 전 운이 좋네요. 상봉 대기자가 5만 명 남았다는데, 오래 산 보람이 있어요.”
고향 가는 게 마지막 소원
평안북도 정주군 덕성동 집 앞에 뜰이 있고 연못이 있었다. 봄이면 뒷산에 진달래꽃이 만발해 산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물론 향수가 짙어질까 참 오랜만에 꺼내본 기억이다. 이런 고향 모습을 기억하는 이도 이제 윤 씨뿐이다. 고향 덕성동에서 남쪽으로 온 친구들이 스무 명 정도 있었으나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70년 만에 이북 땅을 밟아 좋긴 한데…. 사실 고향에 가보는 게 마지막 소원이에요. 제가 덕성동을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일 겁니다. 집 옆 돌담길은 그대로 있을까요? 부모님 산소에도 가서 술 한잔 올리며 ‘열심히 살았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상봉가족 연령 80세 이상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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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5년 11월에 열린 제20차 이산가족 1차 단체 상봉 마지막날인 22일, 강원 고성군 온정리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작별 상봉이 진행된 가운데 남측 딸 이정숙 씨가 북측 아버지 리흥종 씨와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다. ⓒ통일부
8월 20일부터 26일까지 8·15 계기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치러진다. 4월 27일 남북 정상이 합의한 ‘판문점 선언’의 일환이다. 남북은 7월 3일 이산가족 생사 확인 의뢰서를 교환했으며 북측이 의뢰한 200명 가운데 129명 재남가족의 생사를, 우리 측이 의뢰한 250명 가운데 163명 재북가족의 생사를 7월 25일 확인했다.
남북이 생사 확인을 거쳐 최종 상봉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인원은 남측 93명, 북측 88명이다. 판문점 선언에서 합의한 남북 각 100명보다 줄어든 규모다. 이는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하거나 생존 가족이 3촌 이상인 경우가 많아 상봉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남측 방문단의 연령대는 약 90%가 80세 이상이다. 80~89세가 46명(49.5%), 90세 이상 35명(37.6%), 79세 이하 12명(12.9%)이다. 북측 방문단 역시 80~89세가 62명(70.4%), 79세 이하가 21명(23.9%), 90세 이상 5명(5.7%)으로 대부분이 80대 이상이다. 가족관계는 남측이 3촌 이상 42명(45.2%), 형제·자매 41명(44.1%), 부자·조손 10명(10.7%), 북측이 형제·자매 61명(69.3%), 3촌 이상 24명(27.3%), 부자·조손 3명(3.4%)으로 나타났다.
8월 20일부터 22일까지 우리 측 방문단이 재북 이산가족과 만나며, 24일부터 26일까지 북측 방문단이 남측 가족을 만날 예정이다. 최고령자는 남측 101세, 북측 93세이다.
선수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