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청계천 3가와 4가는 서민의 공간이었다. 해방 직전에는 공습 시 화재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 소개공지(일제가 연합군의 공습 폭격에 대비해 만든 공간)로 공터가 됐다. 광복 이후 이곳에 월남민, 이촌향도 이주민 등이 몰려들어 2200여 가구의 판잣집이 들어섰다. 피란 여성들이 먹고살기 위해 몰리면서 ‘종삼(종로 3가)’이라 불렸던 윤락촌도 만들어졌다.
1968년 ‘서울시 현대화’의 일환으로 윤락업소와 판자촌이 있던 자리에 상가가 문을 열었다. ‘세상의 기운이 모인다’는 뜻의 ‘세운상가’였다. 세운상가에서 진양상가로 이어지는 건물은 총 일곱 채로 길게 이어졌다. 지상 4층까지는 상가, 5층부터는 공동주택이라 국내 최초 주상복합건물이기도 했다. 세운상가에는 기계, 공구, 철물, 전자제품 기업이 몰려왔다. 위층 아파트에는 연예인과 유명인사가 거주했다. 천지가 개벽한 듯 청계천은 그 시절 가장 ‘핫’한 곳이 됐다.
1980년대 학생들 사이에서는 세운상가에 가면 “미사일과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TG 삼보컴퓨터’와 ‘한글과 컴퓨터’도 여기에서 시작됐다. 외국 음란서적과 금지곡 음반도 이곳에서는 다 구할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LP판 한 장을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며 청계천을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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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3 ‘메이드 인 청계천:대중문화 ‘빽판’의 시대’의 내부 모습, 당시 청계천에 있던 전자 상가의 모습을 재현했다. 2 ‘메이드 인 청계천:대중문화 ‘빽판’의 시대’ 포스터 4 당시 유행하던 LP판을 직접 들어볼 수 있는 체험 공간도 있다. ⓒC영상미디어
청계천을 찾는다는 건 가장 트렌디한 문화를 찾는다는 것과 동의어이던 시절, 청계천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메이드 인 청계천:대중문화 ‘빽판’의 시대’는 그 시절을 소환한다.
세운상가, 구름다리를 찾는 사람들
1960년대는 ‘대중’이 태동하던 시기였다. 대중문화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대중이 즐기는 문화가 생겨났다. 특히 이 시절은 ‘라디오의 시대’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은 곧 유행이 됐고, 음악방송 DJ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편집 음반은 큰 인기를 모았다. 이들은 모두 ‘빽판’으로 만들어졌다.
‘빽판’이란 LP판을 불법 복제한 것을 일컫는 말인데, 은밀히 뒤에서 제작돼 ‘Back’판이라고 불렀다는 설과 반복해서 복제하느라 품질이 떨어져 음질이 뿌옇게 되었다는 ‘백(白)’판설이 있다. 이처럼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불법으로 복제돼 판매, 유통되는 모든 음반과 서적, 테이프를 해적판이라 부르는데, 우리나라의 해적판은 1950년대부터 만들어져서 1980년대에 최전성기를 맞있다. 빽판이 대대적으로 제작되던 시기에는 경기도 일대에 공장을 두고 청계천 음반가게로 공급하기도 했다. 미군부대나 외국에서 흘러나온 판을 가지고 원판과 같은 소리골을 가진 ‘엄마판’을 만든 뒤 이 판을 도금해 찍어낼 도장을 제작했다. 이 도장을 따라 프레스 기계로 찍어내면 백판이 만들어졌다. 1980년대에 세운상가의 임대료가 저렴해지면서 10평(33㎡) 남짓한 공간에서 영세 제작이 이뤄지기도 했다.
감시와 검열도 삼엄해졌다. 1960년 4·19혁명, 1961년 5·16군사정변 그리고 1965년 한일수교까지 역사는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시민과 학생은 끊임없이 저항했고, 국가는 탄압했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1965년 방송 금지곡이 됐다. 표면상 이유는 ‘왜색이 짙다’였지만, 그 배경은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의 부조리함에 항거하는 국민적 저항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1966년 일본의 빅터뮤직에서는 ‘사랑의 빨강 등불’이라는 제목의 싱글앨범이 발매됐다. 국내에서는 이를 다시 수입해 일본 발매 ‘동백아가씨’의 해적판을 제작했다. 빽판 재킷에는 ‘이미자 히바리고미도리(종다리, 울새라는 뜻) 유행가집’이라는 가사집이 조악하게 붙어 있었다.
‘풍기문란’의 메카
1970년대 민주화운동이 거세지자 정권은 이를 탄압하기 위한 방편으로 ‘긴급조치 제9호’를 시행했다. 이른바 ‘풍기문란 단속’이었다. 겉으로는 “건전한 문화예술 활동을 계속 지원하고 사회 기강을 해치고 국민정신을 좀먹는 저속하고 퇴폐적인 일부 대중예술을 과감히 정화해 건전한 국민정신과 사회 기풍을 진작한다”고 피력했지만 그 속내는 ‘학생·노동운동을 봉쇄하기 위한 장치’였다. 불량도서에 대한 규제는 도색잡지와 음란물부터 용공서적까지 폭넓게 진행됐다. 음악에서도 무더기로 ‘금지곡’이 나왔다. 풍기문란 단속은 대중문화를 위축시켰지만, 거꾸로 음성적인 시장은 더 탄탄하게 형성됐다. 금지곡은 빽판으로, 불량도서는 청계천에서 더 은밀히 거래됐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청계천은 언더그라운드가 숨 쉬었던 운명적인 곳”이었다고 회고한다.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는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이라는 책에서 “세운상가는 욕망의 이름으로 나를 찍어낸 곳, 내 세포들의 상점을 가득 채운 건 트레이시와 치치올리나, 제니시스, 허슬러 그리고 각종 일제 전자제품들이었다”라고 썼다. ‘세운상가는 수많은 나를 먹어치웠고, 내 욕망의 허기가 다시 세운상가를 번창시켰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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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빽판’의 제조 과정을 알 수 있는 사진과 그림들 2 청계천은 1968년 세운상가가 세워지면서 변모하기 시작한다. 3 전시장 안에서는 팩, 콘솔 등의 게임을 즐길 수 있다. 4 1960~1970년대에 발매된 주택복권의 모습도 볼 수 있다. 5 빨간 책과 테이프를 구할 수 있었던 청계천 세운상가의 빨간 방 ⓒC영상미디어
누군가에게 세운상가는 이처럼 ‘볼 빨간’ 기억으로 남는다. 그 빨간 방에는 <플레이보이>, <허슬러>, 복제 비디오와 빨간 만화들이 그득했다. 겉으로는 안의 내용을 알 수 없어서 큰 맘 먹고 구입한 비디오에서 ‘전국노래자랑’이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정치적 불안은 1980년대까지 계속됐지만 경제는 급속히 성장했다. 이 분노와 풍요의 시대, ‘풍기문란’의 메카였던 세운상가는 흔들리는 마음으로 구름다리를 넘게 하던 마성의 아지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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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운상가에서 밀거래되던 음란물들 ⓒC영상미디어
불과 3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가 전 세계 온라인 게임 산업을 선도할 줄 상상하지 못했다. 그 시작은 1980년대 전자오락이었다. 일본에서 들여오는 팩·콘솔게임을 불법으로 복제하는 수준이라 품질은 불량했고, 게임을 즐겨 하는 이들 역시 ‘불량청소년’ 딱지가 붙었다. 하지만 전자오락 산업의 부흥은 세운상가의 디지털 기술력에 빚진 바 있다. 게임 산업은 빠르게 부정적 이미지를 벗으며 새로운 시대의 먹거리 산업이 됐다.
1987년 용산전자상가가 생기면서 세운상가는 가전제품 상가 1위 자리를 빼앗겼다. 이후 중국산 저가제품이 몰려들면서 가격경쟁력마저 잃었다. 철거 위기에 빠진 세운상가를 존치하기로 결정한 건 2014년이다. 세운상가에는 요즘 젊은 창작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저렴한 임대료 덕이다.
지난해에는 공연과 전시 등 문화행사가 열렸다. ‘다시 세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서울시는 이곳에 스타트업 공간을 마련하고 공연광장을 조성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고대웅 작가는 “청계천이 20세기와 21세기가 만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예술과 기술이 조화를 이뤄, 세대와 세대가 만나는 공간, ‘세상의 기운을 모으는’ 세운상가가 다시 꿈꾸는 미래다.
메이드 인 청계천:대중문화 ‘빽판’의 시대
기간 2018년 8월 24일~11월 11일
장소 청계천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서울 성동구 청계천로 530)
문의 02-2286-3410
유슬기│위클리 공감 기자